웹진: [4호] 가족?!?2017.03.27 00:04


열일하는 고양이?


바이섹슈얼은 끊임없이 삭제되고 부정된다. 이것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며 모두에게 공개된 SNS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이다. 바이섹슈얼의 연애는 바이섹슈얼의 연애가 아니라 동성연애나 이성연애로 인지되고, 그리하여 바이섹슈얼은 인식에서 사라지기에 존재 자체가 삭제되거나 어떤 정치적 가능성 자체가 지워진다. 하지만 바이섹슈얼을 혐오하거나 부정하는 이들 상당수는 자신이 바이섹슈얼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이섹슈얼 자체의 잘못이자 문제라고 항변한다. 아마도 이런 항변은 바이섹슈얼이 혐오의 대상으로도 구성되지 못 한다는 뜻이리라. 혹은 바이섹슈얼은 혐오의 대상이 될 자격 자체가 없거나 혐오의 대상이 될 조건 자체를 갖추지 못 했다는 의미거나. 만약 그렇다면 어떤 발언을 두고 바이섹슈얼 혐오라고 문제제기할 때 혐오가 아니며 되려 문제제기한 사람에게 과잉이고 사회성 부족이라고 답하는 일련의 태도는 바이섹슈얼에겐 정치학, 정치적 의제, 누락된 범주의 정치적 가능성 자체가 없다는 인식의 또 다른 판본이다. 바이섹슈얼을 퀴어 정치에서 진지하게 논의할 의제이자 범주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의 구체적 예시는 무척 많은데 그 중 하나는 바로 바이섹슈얼과 결혼의 관계다.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 “남자랑 결혼하면 되잖아” 혹은 “남자 만나서 편하게 살면 되잖아.” 동성애자 혹은 비-바이섹슈얼이 바이섹슈얼 여성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이 발언은 실제 남성과 결혼하는 바이섹슈얼 여성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바이섹슈얼 여성을 혐오하려는 의도, 그 범주 자체를 폄하/폄훼하려는 의도로 사용하는 발언이란 점에서 문제다. 물론 이런 의도 없이 저 발언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발화는 의도가 아니라 그 맥락적 효과를 통해 의미가 발생한다. 그리하여 의도없음이란 항변은 큰 의미가 없다. 어떤 사람은 저 발언의 내용이 진실/사실이고 바이섹슈얼은 결국 동성애자나 이성애자가 될 뿐이라며 바이섹슈얼 범주와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렇게 부정해도 괜찮다고 큰소리 치는 경우도 적잖다.

그런데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와 같은 종류의 언설은 바이섹슈얼 혐오일 뿐만 아니라 ‘여성’혐오다. 남성과 만날 여지가 있는 사람은 곧 남성과 결혼할 사람이며, 남성과 만나거나 만날 여지가 있는 사람은 남성과 결혼해야 하는 사람으로 등치하는 한국 사회의 지독한 여성혐오를 공유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성’이건 ‘남성’이건 성인이면 결혼을 해야 하고 성인 ‘여성’과 성인 ‘남성’이 연애를 하면 그것은 결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거나 그럴 잠재성이 있다는 한국 사회의 인식론이 저 발언에도 내포해 있다. 만약 성적 선호나 지향이 무엇이건 성인 여성으로 통하는 사람이 남성으로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결혼을 당연한 사회적 의례이자 의무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해야만 ‘정상적’ 사회/가족 성원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지배 규범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바이섹슈얼 관련 이런 언설을 자동연상처럼, 연관검색어처럼 떠올릴 이유가 없다.

여기서 잠깐 유의할 점은, 이런 언설이 또한 한국 사회에서 비혼 운동을 어렵게 만드는 배경이 되고, 비혼을 미혼으로 만든다. 결혼하지 않음이 아니라 결혼 못함으로, 결혼 못함/안함을 무능력으로 등치하는 사회에서 비혼 운동은 결혼 자체를 다시 사유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바이섹슈얼 여성을 곧장 결혼으로 등치시키거나 연관짓는 이런 일련의 언설은 비혼 운동 역시 삭제한다.

또한 “남자와 결혼하면 되잖아”, “남자와 결혼할 수 있잖아”와 같은 언설은 한국 사회에서 법적으로 허용되는 형태의 결혼이 ‘여성’에게 어떤 의미인지 사유하지 않거나 너무 안일하게 사유한다. 결혼을 통해 많은 ‘여성’이 경력 단절을 겪고 아내 폭력 등의 폭력 피해를 겪으며 자주 괴물이나 벌레(“맘충” 같은 표현으로) 취급을 당한다. 하지만 바이섹슈얼 여성을 향한 저 발언은 결혼 제도의 부당함, 폭력성을 도피나 안식, 권력 획득 정도로만 이해한다. 이것은 여성혐오라고 말하기에 앞서 그냥 현실 파악 자체가 안 된 발언이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에서 결혼은 계급 이슈, 경제 이슈로 변하고 있다. 경제적 여건과 결혼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경제적 여건을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물론 ‘취집’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취집’이란 표현의 문제점과는 별개로)취집도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건이 되는 여성에게나 좀 더 가능한 일이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여성은 취집도 어렵다. 결혼 자체를 포기하는 3포 세대, N포 세대를 이야기하는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여성’에게 일방적 이득이 결코 아니며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하면 되잖아”, “결혼할 수 있잖아”와 같은 언설은 지금 현 시대 상황을 완전히 간과한, 초월적 발언이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이 등장한다. 지금 한국에서 동성애의 주요 이슈는 동성애결혼으로 전환하고 있고 동성결혼은 감히 함부로 반대하면 안 되는 이슈가 되고 있는데, 왜 바이섹슈얼의 결혼은 비난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가란 점이다. 누군가는 동성결혼만 허용되면 LGBT가 겪는 차별 이슈가 모두 해결될 것처럼 말하기까지 하지만, 정작 바이섹슈얼의 결혼은 비난과 배신의 상징처럼 회자된다. 결혼이 경제적 계급, 소득의 문제로 더욱 노골적으로 전환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결혼만 허용되면 모든 차별이 해결될 것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결국 누구의 어떤 결혼이 말할 가치 있고 평가할 가치가 있으며 누구의 어떤 결혼이 비난과 추방의 근거로 쓰이는지, 결혼 자체의 복잡한 의미 작용을 질문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강력한 의심이 등장한다. 남성과 만났거나 만나거나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할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가정한다면, 바로 그 반응은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동성애)결혼을 욕망하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강하게 의심스럽다. 연애를 결혼의 전단계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으니까 결혼하는 것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의 발언을 하거나 이에 동조하기 어렵다. 아무리 바이섹슈얼 여성을 비난하거나 삭제하고 싶어도 이런 연결고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표현을 사용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런 언설을 사용하고 반복하는 것은 정작 그 자신이 연애가 결혼의 전단계, 결혼을 위한 욕망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자기 고백이다. 그러니까 바이섹슈얼 여성을 향해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라고 비난하는 동성애자 혹은 이성애자의 태도는 “나는 동성애결혼(혹은 이성애결혼)을 하고 싶다”는 욕구의 표출이다. 그렇기에 동성결혼이 그렇게 중요한 이슈, 성역이자 금기와 같은 이슈로 등장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발언, 이러한 욕구는 결혼이 이성애결혼과 동성애결혼 뿐이며 그 외의 결혼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분법, 배타적 오만함/인식론의 표출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바이섹슈얼 연애나 결혼을 동성애/동성애결혼, 이성애/이성애결혼으로 호명하는 태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바이섹슈얼 개인이 연애를 할 순 있지만 바이섹슈얼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모든 관계를 이성애 아니면 동성애로 환원하는 태도와 같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환원하는 태도와 정확하게 공명한다. 어떤 연애 관계를 이성애 혹은 동성애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 관계에 위치한 사람들의 관계가 이성이거나 동성이라고 확정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젠더를 이성 아니면 동성, 즉 다른 젠더 아니면 같은 젠더로 단박에 인식할 수 있고 확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밑절미 삼는다. 모든 사람을 이원젠더 체제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것을 기본값 삼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트랜스젠더퀴어, 인터섹스 등을 사유하지 않는 태도며 삭제하는 행위다. 더 정확하게는 모든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를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끊임없이 환원하는 이성애-이원젠더 체제에 공모하고 공고히하는 행위다.

하지만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는 젠더 실천과 몸의 ‘섹스’화된 구성이 둘 중 하나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젠더는 분명하게 명명하기 힘들고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고 섹스 역시 둘로 나누는 것(예를 들어 XX와 XY)은 ‘과학적 사실’이 아닐 정도로 복잡하다. 그래서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는 질문한다. 젠더와 몸의 복잡한 양상을 고민한다면 동성이란 개념은 어떻게 가능하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개념으로 고집할 수 있느냐고. 동성애란 개념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것은 우발적 사건인데 이를 자연질서로 만들여 이성/애와 동성/애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 작동은 무엇이냐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인데 관계의 복잡성을 말하는 바이섹슈얼은 정확하게 지런 지점에서 트랜스젠더퀴어 및 인터섹스와 문제의식을 교차한다.

문제의식을 교차하는 측면과는 별개로 “결국 남자와 결혼할 거잖아”와 같은 류의 발언은 바이섹슈얼과 트랜스젠더퀴어, 인터섹스를 동시에 배제하고 추방하는 언설이다. 그리하여 동성애와 이성애만을 사회적 규범으로 구축하고자 한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와 같은 종류의 발언은 정말 바이섹슈얼 여성을 향한 혐오인데 바이섹슈얼 범주만 부정하고 삭제하려는 의도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발언은 현상이나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종류의 건조한 기술이 아니다. 남성과 연애를 할 여지가 있는 여성을 어떻게든 남성과 연결해서 사유하는 태도며, 여성이란 남성과 관계를 맺어야만 의미가 있고 존재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어떤 범주의 여성이건, 남성과 연애를 할 가능성이 있기에 결국 남성과 결혼할 것이란 사유의 흐름은 결국 여성을 남성에 귀속된 존재로 취급하는 ‘여성혐오’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결국 남자랑 결혼할 거잖아”와 같은 표현은 바이섹슈얼 여성이 실제로 남성과 결혼을 하는 어떤 경험 혹은 그럴 가능성만을 비난하는 언설이 아니다. 바이섹슈얼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를 포괄해서 부정하려는 어떤 ‘기획’을 내재하는 정치 행위다. 그러니 이런 언설은 그 자체로 비판받아야 하며, 이런 발언을 하는 사람이 바이섹슈얼 혐오 뿐만 아니라 트랜스혐오, 여성혐오를 내면화하거나 그런 혐오에 동조하는 사람은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 다음 생엔 고양이가 사는 나무로 태어나고 싶은 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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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이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