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4호] 가족?!?2017.03.27 00:02

◆ 결혼을 믿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단순히 정부의 제도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제도다."[각주:1]


조용한 오후였다. 나는 반려견과 나란히 누운 채로 퀴어포비아용 신간 <동성애 is>를 읽었다. 덕분에 혐오 세력의 의중을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나와 당신은 완벽한 타인이고 당신이 누구든 내겐 아득히 멀다. 나는 당신을(당신이 누구든), 그들을(그들이 누구든 말이다) 결단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내 안에서도 길을 잃는,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니까. 하지만 표지의 동성애 글자가 너무 커서 지하철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그 책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뭐, 여기서 소개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시달렸고, 나쁘고 틀린 말에도 여전히 상처를 받곤 하니까. 다만 통계와 수치의 홍수 속에서 하나의 흥미로운 선언을 발견했다. 결혼이 종교적인 제도라는, 창세기적 천명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자신 있게 얘기하는 이유를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있다. 정말로, 대한민국에서 결혼은 종교다. 결혼이 삶의 당연한 수순이며 신성한 권리라고들 한다. 초혼 평균 연령과 출산률이 보이는 반비례에 국가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한다. 임산부 배려석에는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가 붙는다. 영화나 드라마에도 연애, 결혼, 혈연가족의 신파가 넘쳐난다. 비혼은커녕 미혼의 상태조차 견디지 못하는 ‘오지랖’에 대부분이 끔찍해하면서도 결혼 밖의 삶을 상상하기 어려워한다. 잊고 살다가도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엔 결혼의 제단이 있다. 입교한 적이 없는데도, 나는 결혼이란 종교의 일원이 되어 있다. 가장 사적이면서 가장 공적인 제도, 결혼이라는 종교의 악습은 그렇게 이어진다.


추측컨대 영미유럽권의 변화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는지 결혼교(敎)는 최근 동성결혼을 공공의 적으로 본격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성혼 법제화 논의와 관련된 구체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잘 정리된 자료가 많을 것이다. 다만 나는 퀴어 주체를 연민과 혐오 섞인 서브컬처로서만, 어둠 속의 크루징, 자기혐오로 점철된 정체화(=‘성정체성 혼란’) 과정, 불행한 에이즈 환자 따위의 이미지로만 보도하던 추상적 ‘당신’의 예전을 떠올려본다. 너의 불행을 내가 구원한다(혹은 구원할지를 선택한다)는 권력은 ‘당신’에게 더없이 달콤하기만 한 것 같다. 이제 결혼이라는 국가적 종교에 적극 결탁하려는 일부[각주:2]의 주장에 ‘당신’은 즉각적인 거부 반응을 보인다.


[출처: 크리스찬데일리]


[출처: 연합뉴스]


자, 노골적으로 오독해보자. 사실 나는 ‘당신’이 “1남 1녀 결혼”을 마냥 아름답게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정말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를 진지하게 상상해보지 않았으며 실은 마케팅을 위해 최대한 자극적인 문구를 뽑아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그 두려움은 주로 추상의 형태로 ‘당신’의 머릿속에서만 반복될 것이지만, 내가 커밍아웃하는 순간 알레르기 같은 거부감이나 심지어 즉각적인 구토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당신’은 나와 깊이 대화함으로써 포비아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무엇보다 ‘당신’이 쥐고 있는 작은 권력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쓸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것은 ‘당신’이고 틀린 것은 내 쪽이니까 최대한 우아하고 지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겠다고 다짐하고 실제로 성공하고 있다고 자위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당신’이 정말 지키려는 것은 ‘신성한 결혼’ 따위가 아니라 ‘나는 결혼할 수 있다/결혼했다’라는 결혼교(敎) 내부자로서의 위치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반복하지만, 나의 오만은 영원히 틀릴 수 있다.


다시 인용문으로 돌아가, 결혼이 종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제도라고 말한 데에 주목해본다. 여기에는 제도 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욕망이 숨어 있다. 제도는 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고, 승인하고, 보호한다. 아이리스 영의 말[각주:3]을 빌리면, 혐오는 침투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회 체계에 승인된 주체는 ‘외부’에 해당하는 타자를 혐오하고 적극적으로 추방하지만, 동시에 내부가 외부가 되어버리는 경계, 즉 배설경로 때문에 혼란에 휩싸인다. 그래서 가장자리, 주변부는 위험하고 두려운 것으로 그려진다. 포비아들의 항문 성교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감 역시, 몸의 침투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영의 분석은 흥미롭게 정확해 보인다. 결국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손 안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결혼의 권력에 대한 침투이다.


결혼교 수호에서 중요한 것은 혐오라는 감정이 아니라 ‘승인한다 VS 거부한다’의 행위이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다른 이유 없이 그저, 가장 자극적이기 위해서 남성 동성애자를 선택했으며 레즈비언, 바이,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것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관심도 없으리라 추측한다. 결혼이라는 종교는 결국 정치적 세력화의 문제이고, 효과적으로 표를 얻으려면 게이에 대한 공격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LBTQ+ 진영은 반복적으로 가려진다.



◆ 원래 복잡한 결혼, 으로 쿠데타를


아, 서두가 길었다. 동성혼 논의를 길게 끌어온 이유는 결혼이라는 종교의 조금 다른 모습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어슐러 K. 르 귄의 ‘세도레투’ SF 판타지 소설 세 편—「내해의 어부」(A Fisherman of the Inland Sea, 1994), 「선택하지 않은 사랑」(Unchosen Love, 1994), 「산의 방식」(Mountain Ways, 1996)이다.


‘세도레투’는 여성 두 명과 남성 두 명 사이의 바이섹슈얼 폴리가미 결혼을 의미하는 르 귄의 세계관이다. 행성 O에서는 이 바이-폴리 결혼이 정상 규범이며 성별뿐 아니라 올바른 ‘반족’의 조건을 맞춰야 한다. 르 귄은 다소 복잡하지만 매력적인 이 세계관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 분투했다.



[출처: bemusedlybespectacled, artaline. 세계관이 복잡한 만큼 다양한 소개 짤들이 있다.]


장르소설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나 포함)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르 귄의 말대로 결혼은 원래 대부분 복잡하지 않은가. 섹스 할 수 있는 상대를 공식적으로 지정받는 조건은, 참으로, 귀찮을 정도로 복잡하지 않은가. 제단 위의 결혼은 오직 이성애 결혼으로만, 주로 내국인끼리의-근친외적인-재생산에 성공한-이성애-기혼 가족의 형태로만 입교를 승인한다. 이 범주는 지나치게 좁고 다행히(?)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결혼이라는 종교의 불가침 태도는 여전히 확고하다. 르 귄은 결혼의 조건을 재밌게 비틀어 보였다. 이렇게 약간만 뒤틀어도 결혼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누군가에겐) ‘괴상해’ 보인다.


이를테면 인간을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는 반족 설정은 성별 이분법에 대한 패러디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부 사회에서는 나이와 성별로 권력을 지닌 자들이 … 인간이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하고, 힘이 그 근본적인 구분이며, 한 성별에 더 우월한 힘을 부여한다. 우리에게, 근본적 구분은 반족이다. 성별은 크긴 해도 부차적인 차이다. 그리고 권력을 추구할 때, 누구도 타고난 특권적 위치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확실히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 「선택하지 않은 사랑」 , 『세상의 생일』(최용준 역, 시공사, 2015), 134쪽


반족-성별 구분에 따라 인간은 아침/저녁 여성/남성으로 세분화되고, 여기에는 특별한 지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한쪽 성별에만 우월한 힘이 부여되는 현실은 이제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젠더 차별에 대해서는 이미 흥미로운 상상력을 동원한 <이갈리아의 딸들>이나 <여자만의 나라>, <어둠의 왼손>, <셀프>[각주:4]등의 작품들이 멋지게 패러디한 바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매료된다. 성별 권력에 너무 오랫동안, 놀랍게도 지금까지 꾸준히, 질식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처럼 우주적 시간을 넘은 작품에서 순간의 구원을 본다.


더불어 세도레투 세계관에서는 같은 성별보다 같은 반족끼리의 관계가 더 금기시되기에, 같은 반족의 이성애 관계는 금지되지만 다른 반족의 양성애 관계가 정상 규범이 된다. (트랜스/젠더퀴어의 경우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침 여성의 경우 아침 남성, 저녁 여성, 저녁 남성과 결혼하지만, 아침 남성과는 섹스 할 수 없다. 이 규칙을 어길 경우 사회적 멸시를 감수해야 한다. 이는 현실의 비이성애자 차별에 대한 명료한 패러디이다. O행성에서는 모노가미 이성애자야말로 성적 소수자다. 테라(지구)에서 온 사람에게 ‘결혼을 둘이서만 한다니?’라며 신기해하는 장면(「내해의 어부」)도 재밌지만, 「산의 방식」에서 아침남자 ‘오토라’가 이성애자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장면을 보자.


"전 그저 여자만을 원합니다." 오토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아칼은 오토라의 겸손에 마음이 아리고 슬퍼졌다. 이제까지 오토라가 이런 무지, 이런 수치심으로 괴로워해야 했던 건, 남자들이 다른 남자들에게 하는 허풍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산사람들의 냉혹함 때문이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양쪽 모두를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언제나 있습니다. 그건 마치……." 아칼은 "스펙트럼의 양끝과도 같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건 빗질가 아칼의 언어도, 손질가 오토라의 언어도 아니었다. "자루의 양끝과도 같습니다. 야마 털을 제대로 넣는다면, 털 대부분은 중간에 있게 되지요. 하지만 자루 끝을 묶을 때 보면 털이 양끝에도 조금 있게 됩니다. 그게 우리랍니다. 많은 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194쪽)


패러디는 원본의 권위를 조롱하기 위해 애쓴다. 어쩌면 오직, 그 목적만을 향해 달려간다. 이성애자를 소수자의 위치로 주욱 끌어내리는 설정이 다소 고루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운 좋은 독자일 것이다. 더 이상 원본의 기획에 속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반면 소수자로서 슬퍼하는 이성애자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위안이나 통쾌함을 느꼈다면 우리에겐 여전히 패러디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보다 조악하고 단순한 형태라도 더, 더 많은 상상력의 쿠데타가 말이다.



◆ 가장 낭만적인, 가장 폴리-적인


새삼 패러디의 가치를 강조하니 민망해진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다. 무정형의 당신이나 특정한 ‘당신’을 설득할 자신도 없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에게 바이-폴리 관계의 가능성을 (단어로나마) 알리거나, 운이 좋다면 르 귄의 작품들을 읽어보게 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건 퀴어 서사가 그 자체로 의미 있다거나, 바이-폴리 관계는 이성애-모노가미 관계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잘못 읽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글을 준비하는 내내 껄끄러웠다. 세도레투를 둘러싼 르 귄 식의 로맨스(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서사는 '결혼'을 위해 분투하고, 가족 내부의 사랑과 존경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이성애 규범적 결혼 신화의 반복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O 행성은 세도레투 바깥의 관계를 금지한다. 그곳에서는 세도레투 세계관이 정상 규범이다. 특정 관계를 승인하거나 금지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결혼에 대한 국가적 권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퀴어한 가족이 반드시 맞설 수밖에 없는 이성애 기혼 가족이라는 축은 바이-폴리 가족이라는 다른 축으로 교체된 것처럼 보인다. 결혼이라는 종교는 굳건하고 다만 바이-폴리라는 이교(異敎)가 출현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르 귄의 작품들은 결혼이라는 종교를 믿는 자들을 위협하는가? 앞서 얘기한 이성애-결혼 신도들이 두려워하는, 결혼이라는 권력에 대한 침투에 성공하는가? 혹은 단순히 결혼의 신화를 반복하는가?


[출처: Wikipedia. 왼쪽부터 <내해의 어부>, 나머지 두 편이 수록된 <세상의 생일>]


「내해의 어부」는 순간이동 ‘처튼 기술’에 몰두하는 주인공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그려낸 수작이다. 소설 서두에 전체 줄거리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우화가 등장하는데, 곧바로 당신을 매혹시킬 것이라고 감히 확언할 수 있다. 단연 마음을 잡아끄는 이 단편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풀어낼 생각은 없지만, 원가족으로의 낭만적인 회귀를 보여주는 결말 부분에서는 동성혼을 적극 추진하는 진영이 받았던 비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스이성애중심주의가 기획한 가족주의를 답습한다는 비판 말이다. 그래서 바이-폴리 결혼에 집중하여 읽은 독자로서는 아름다운 언어가 쏟아지는 「내해의 어부」보다, 바이-폴리 관계만의 고충을 재밌게 담아낸 「선택하지 않은 사랑」과 「산의 방식」을 더 흥미롭게 읽었다. 물론 나는 나만의 독법에 갇혀 있으므로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다.


그러나 반복하여 읽을수록 르 귄의 세도레투 세계관 3부작이 집중하는 것은 결혼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필수적인 ‘노력’의 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좁게 보자면 결혼이지만 넓게 보면 어떤 종류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일련의 노력 말이다. 즉 이 작품들이 회복하려 하는 것은 결혼의 낭만이 아니라 관계의 낭만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그 낭만이란,


일 번. 나(들)과 당신(들)이 만난다, 아니, 만나기로 ‘선택’한다.


“당연히 모종의 조정이 필요하다. 세도레투를 맺어주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주요 소일거리다. 실험이 권장된다. 4인조들이 형성되고 해체되고, 2인조들이 다른 2인조들과 섞이고 맞춰보며 시험을 해본다.”

-「내해의 어부」 (『내해의 어부』, 최용준 역, 시공사, 2015), 252쪽


서로에게 가장 적합한 ‘조합’을 위해 여러 4인조들과 2인조들이 이리저리 섞이는 과정을 상상하면 왠지 귀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실험”은 아주 진지하다. 관계 안에 있는 나와 타인을 존중하겠다는 선언이자 실천이다. 이처럼 더 좋은 관계를 위해 구성원 모두가 노력하는 이상은 (물론) 쉽게 이뤄지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선택하지 않은 사랑」의 주인공 아침남자 ‘하드리’는 다른 지역에서 저녁남자 ‘수오르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적극적인 구애를 받지만, 낯선 타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꺼려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하드리는 안개 깔린 운하에서 신비로운 여자 ‘안'나드’를 만난다. 그의 고민을 들은 안‘나드는 이렇게 말한다. "선택하지 않은 사랑. 아, 그런 사랑은 힘들어요."(145쪽)


안‘나드가 말한 ‘선택하지 않은 사랑’은 관계에서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온전히 전하지 않은 채 지지부진 끌려가는 사랑이다. 하드리가 늘어놓는 방어적인 ‘변명’―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면 겁쟁이가 되니까, 상대를 얻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싶어서—때문에 원하지 않는 상태도 꾹 참아버리는 사랑 말이다. 그건 ‘선택하지 않은 사랑’이고 ‘힘든 사랑’이다. 관계에 발을 들인 이상 당신은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관계 안의 당신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책임이다. 하드리는 안‘나드의 조언에 따라,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게 된다.


이 번. 나(들)과 당신(들)은 필연적으로 부딪친다. 하지만 노력한다.


네 배우자는 원하는 대로 원하는 때마다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언제나 반드시 초대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며, 그 때마다 넷 모두가 알아야 한다. 네 명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앞으로 네 명이 보낼 모든 시간은 각 결정과 초대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 반드시 신뢰가 생겨나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이 체계 전체가 확고하게 서지 못하거나 이기심과 질투와 슬픔 속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 「산의 방식」 198쪽


폴리가미 관계의 기본 정책 그대로, 세도레투의 바이-폴리 결혼은 당사자들간의 합의를 가장 중요시한다. 충분히 대화하지 않는 관계, 공평하게 합의되지 않은 결혼, ‘선택하지 않은 사랑’은 (하드리의 말을 빌리자면) ‘물에 빠져 죽는’ 결말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든 그렇지 않은가.


폴리가미 관계 내부의 부딪침과 합의점을 알기 쉽게 보여주는 작품이 「산의 방식」이다. 주인공 ‘샤헤스’는 사랑하는 연인 ‘아칼’과 결혼하기 위해 반족-성별 균형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결혼한 후에도 아칼만을 편애한다. 상대들을 평등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폴리가미 관계의 기본 법칙을 어긴 샤헤스에게 구성원들은 한목소리로 분노한다. 이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산악 지대에 한쪽 다리가 부러진 야마가 고통스런 모습으로 출현한다. 샤헤스는 그 야마를 죽인다. 네 다리로 지탱하는 세도레투 관계에 대한 다소 조악한 상징이지만 메시지는 분명하다.



◆ 관계의 춤과 길을 회복하기


이쯤에서 나는 다시 「내해의 어부」로 돌아가려 한다. 히데오는 시간 간격 없이 곧바로 이동하는 일종의 순간이동 기술, 처튼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어머니 ‘이사코’에게 처튼 기술에 대해 설명한다. 히데오의 말을 들은 이사코는 이렇게 대답한다.


"넌…… 우리 은하를, 우리 우주를 줄어들게 하는 거니? (중략) 그런 게 옳을 리 없어. 간격 없이 사건이 생기다니……. 춤은 어디 있지? 길은 어디 있지?" (280-281쪽)


춤과 길은 분명 역사라는 ‘사건’에 필요한 지난한 시간,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물리적/감정적 충돌을 의미하는 듯하다. 은하를 만드는 것은 ‘간격’이다. 막막하게만 느껴지는 춤과 길의 과정 없이 우주는 생성되지 않는다. 나는 이 '간격'을 관계에 꼭 필요한 대화와 평등함으로 읽었다. 나(들)과 당신(들) 사이에는 아득한 간격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만나고, 춤을 추고, 함께 길을 만든다. 그렇게 우리의 우주가 만들어진다. 때로 우리는 이 간격을 줄이고 싶어진다. 인간은 이기적인 게으름에 기울어진 생명체라서, 존중하는 법을 잊고 쉬운 쪽으로 넘어진다. 관계의 간격 따위를 황급히 뛰어넘고자 한다.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든 춤추고 걷는 과정은 중요하다.


‘당신’은 결혼을 종교적인 제도로 선언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작은 글에서 조금 다른 종교를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확언했기에 오히려 비스듬히 어수선하고 싶었던 나의 말들이, 아득한 간격을 넘어 ‘당신’에게 닿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르 귄은 “당신 자신과는 다른 존재”를 타자로 정의했다.[각주:5] 지구라는 작은 행성, 르 귄 식으로 ‘테라’에서 나는 반드시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난다. 무수히 마주치고 섞인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났을 때 ‘당신’은 나처럼 막막할 것이다. 겁에 질릴 것이다. 춤과 길을 잊은 채 뛰어넘고 싶어질 것이다. 사실 나는 그렇다. ‘당신’도 그럴 것이라 나는 추측한다. 그때 마침 ‘당신’ 중의 어떤 글과 르 귄의 소설을 함께 읽은 새 계절의 우연함 때문에, 나는 변명처럼 ‘당신’에게 이 글을 전하고 싶었다. 나와 다르기에 당연히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처럼 우연을 적극적인 인연으로 끌고 가는 소설적 용기를, 서툴게나마 건네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답을 기다린다.


"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려 노력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 그것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그게 결혼입니다. … 종교는 사랑 속에, 존경 속에 있습니다."

- 「산의 방식」 196쪽 (강조는 필자)




- 사실은 SF 머글. 퀴어문학 마니아.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활동가 보배




  1. 백상현, 『동성애 is』, 미래사, 2015, 84쪽. [본문으로]
  2.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해서는 퀴어 인권운동 진영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기본권 보장(찬성) vs 이성애 가족주의에 동화되는 정치(반대) 입장을 잘 정리한 서동진 논문을 읽어보면 좋다. (서동진, 「퀴어가족? 가족, 사회, 국가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진보평론』 2011년 여름(48호). [본문으로]
  3. 자세한 논의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조현준 역, 문학동네, 2008) 336쪽부터. [본문으로]
  4. 게르드 브란튼베르크 <이갈리아의 딸들>(1977):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반대로 그려낸 젠더 패러디 문학의 대표작. / 샬롯 퍼킨스 길먼 <여자만의 나라>(1915): 여자들만의 가상 국가 HERLAND를 배경으로 한 초기 페미니즘 소설. / 어슐러 K. 르 귄 <어둠의 왼손>(1969): 남녀 양성의 생물학적 특징을 갖고 26일을 주기로 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가상의 행성 ‘게센’ 이야기. / 얀 마텔 <셀프>(1996): 비정기적으로 성별이 바뀌는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한 현대 젠더/퀴어문학의 걸작. [본문으로]
  5. The Language of the Night: Essays on Fantasy and Science Fiction. New York: Putnam, 1979, 87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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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이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