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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4호] 가족?!?

[기고] 엄마와의 유럽 여행, 그리고

유럽에서 첫 유학 생활 1년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다음 학년이 되기 전인 방학 동안 한국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현 거주지인 ‘어느’ 도시에서 방학을 보내기로 했다. 한국에 가면 부모님 집에 머무르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내 연애 사실을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애 사실을 들키기에는 나의 연애와 나의 지향성을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에게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해를 준비하며 방학 동안 ‘열공’ 한다는 핑계로 한국에 가지 않을 것임을 엄마에게 이야기하자, 엄마는 “그럼 내가 널 보러 가면 되겠네”하고 내가 사는 곳으로 와버렸다.

 

사진 1: 내가 사는 '어느 도시' 대략 이렇게 생겼다.


나는 엄마에게 ‘동성애자인 것 같은 이성애자’였다

엄마가 어느 도시에 오기 전, 나는 여자친구와 함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며 안절부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엄마에게 ‘동성애자인 것 같은’ 이성애자였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남자친구’를 사귀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엄마에게 나는 남자친구를 사귐으로서 ‘이성애자’라는 확신을 주었고 그와 헤어짐으로서 불안감을 주었다. 엄마는 내가 그와 헤어졌을 때 이유를 물었고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잘 몰랐으니까. 그저  스스로에 대한 불안함으로 그에게 “내가 양성애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라고 말했고 그는 어떻게 남자친구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분노했던 것을 나는 두고두고 기억할 뿐이다.

내가 바이인 것을 정체화 할 수 없었던 그때에도, 그 이별부터 엄마에게 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결혼하지 않을 꺼야”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선견지명 같은 거였다. 내가 바이라면 나를 있는 그대로 납득할 헤테로 남성도 레즈비언 여성도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엄마는 버럭 화를 내며 “그럼 너가 동성애자라는 거냐”라고 따졌다. 난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답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왜 그 말을 해야 돼?”라는 말이 내가 나를 방어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엄마는 다시 되물었다. “그럼 나 때문이라는 거냐?”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

엄마는 내가 동성애자라면 당신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아빠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남자를 ‘아빠처럼 생각해서’ 동성을 찾는 거냐는 질문 같았다. 확실히 애인으로서 남성보다는 여성을 더 선호한다. 전 남친의 분노를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바이인 것을 존중 받는 문제를 떠나서 최소한 스스로가 가진 ‘여성혐오’를 반성하는 남자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엄마는 항상 아빠보다 좋은 남자들이 존재한다고 내게 말했지만 나는 ‘아빠이거나 아빠보다 덜 나쁜’ 남자들 사이에서 복불복 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족이라는 요인을 떠나서 순수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서 바이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이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유전적 요인에 의한 것인가”하는 질문은 폐기 처분해야 한다. 환경적 요인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넓은 범주인데 반해 유전적 요인이라는 단어는 매주 협소한 하나의 (역시나 환경적인) 요소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도 그 많은 환경적인 요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러나 나는 그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로부터 3년 뒤, 유럽에서 나를 보는 것이었다. 난 엄마에게 애인이 아닌 내 지향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엄마는 내가 여전히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실 것이다. 나는 애인에게 엄마는 지향성만은 설득할 것이라고, 남자든 여자든 만날 수 있는 나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고 말했다.


아직도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불안감과 그래도 여행한다는 것에 약간은 설레어 하는 마음으로 엄마를 만났다. 미술관들을 돌아다니고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었다. 유럽은 언제나 그렇듯 비가 쏟아졌고 다리 아프게 걸어 다니니 금방 지쳤다. 자주 휴식을 취해야 했고 자주 카페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휴식을 취하며 입을 열었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나 서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진보적’이고 다른 사람들과 여행을 자주 했던 엄마는 그녀가 만난 ‘비상식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현재 정치 이슈에 대한 짜증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고 내가 만난 ‘비웃을만한’ 사람들을 꺼내야 했다.


“소문이 있어 그렇게 그들의 장관직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들이 ㅂㄱㅎ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지. 양성애자래. 그래서 성...관련된 기구도 많대”


여행 초반의 휴식에서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그때 또 다시금, 그러나 새롭게 알았다.


‘아 이 사람에게 내가 양성애자라는 말은 할 수 없겠구나.’


엄마에게 양성애자라고 말함으로써 안심 시키겠다는 나의 계산은 얄팍하기 그지 없었다. 이미 여자친구와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는 나는 남자를 배우자로 만날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 일말의 기대를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반드시 당신을 실망 시킬 것이다. 나는 반드시 당신이 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욕설을 듣고 말 것이다.

사실 당신에게 나의 지향성과 연애에 대해서 말할 나만의 계획이 있었다. 인턴을 구하고 이 도시의 국제기숙사에 등록하게 되어 자립할 수 있게 되는 날에 말하리. 이 계획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 기간을 엄마와 나 모두 평화롭게 넘길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힘들게 계획을 짜서 말해도 엄마는 ‘너는 양성애자라면서 왜 여자친구를 사귀는 거니’하고 원망하시지 않을까. 결혼 시켜 버릴 남자를 알아본다고 하시지 않을까.


나는 당신이 밉다고 바이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막히는 벽을 의식하며 나는 엄마와 여행을 계속했다. 마음 속에서는 끊임없는 싸움을 했다. 여행 중에 미흡한 준비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질 때, 그리고 그에 대한 실망으로 엄마가 화를 낼 때 나는 버럭 맥락도 없이 커밍아웃을 하고 싶었다. 억울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졸이면서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노력을 했는데, 그리고 결국은 나를 숨겨야 하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 결국 당신의 섭섭함을 울분으로 나에게 쏟아내면 그만 이다.


‘당신은 이 여행을 마지막 유럽여행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아쉬운 것이겠지.’


매번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삼켰다. 나는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화난 김에 내던지는 커밍아웃’은 스스로를 후회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들과는 상관없는 우리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누구 집 애가 공부만 해서 불쌍하다’, ‘교육이 잘못되었다’, ‘부모가 결국 애를 학교에서 소외되게 만들었다’, ‘누구는 결혼을 너무 빨리 했다’ 등등

‘학교에서 소외된 모 여학생’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와 닮은 과거들을 암묵적으로 콕콕 찌르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눈치 있게 재빠르게 또 다른 사람으로 이야기를 옮겨가 스스로가 대상이 되는 것을 피했다.


나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넌 남자친구 같은 거 없냐”

“에이 공부하느라 바쁜데 그런 게 어딨어”

“결혼할 거면 빨리 말해라”


동성 결혼이 합법인 국가에서 연애하고 공부를 하고 있으니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이웃 나라로 가면 정자 기증을 받아 아이도 가질 수 있다. 그래도 나와 여자친구 모두 공부에 욕심이 많은데, 가정을 꾸린다는 건 어렵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아는 것도 없이 여자친구에게 아이를 몇 낳고 싶은지 물어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여자친구는 본인이 외동딸로 태어난 것에 만족한다며 한 명만 낳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그때의 대답이 진심이었는지 그녀에게 다시 묻자,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내 의견을 물었었다.


“나는 아직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겠어”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네가 원하면 노력해 볼께”


나는 버벅이며 말했다. 단순히 침묵을 깨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나도 네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릴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때 내가 엄마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처음으로 진지하고도 기쁘게 해보았다. 나는 그 기쁜 상상을 나의 엄마에게 말할 수 있을까. 엄마와 나눌 수 있을까. 나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어떤 고백도 이르고 늦은 것 같았던 순간이었다.

글을 쓰며

글을 쓰며 이 글을 당신이 읽을 수 있을까 겁을 내고, 많은 내용을 삭제하며 글을 써야 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그 만약의 가능성으로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이 글을 쓰는 요지를 오해하지 않게 덧붙이고 싶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나는 나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조그만 하게 말해보고 싶어서 이다. 공항에서 내리면 숨이 턱턱 막히는 한국이라는 벽과 가족이라는 벽에 다가 중얼거리기라도 해보고 싶어서 이다. 차마 다 못하는 웅얼거리기는 내년에, 또 내후년에 마주칠 때 더 행복해져서 조금이라도 더 크게 말하고 싶다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망고백이기도 하다. 감춰야 함에도 행복하다는, 이대로 어설프게, 그러나 생각보다는 잘 살고 있다는 신호를 어딘가에 보낼 수 있음에 기쁨을 느낀다.



- 박쥐가 더 많은 박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람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