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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1호] 커밍아웃

[기고] 딱히 당신을 대단히 믿어서 커밍아웃한 건 아닙니다?


*기고: 집삵

종종 접하게 되는 착각 중 하나는, 커밍아웃을 받은 것이 상대방이 자신을 대단히 신뢰한다는 증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1:1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커밍아웃이 비밀 공유(비밀을 서로 공유한 사람들끼리는 좀 더 친밀한 관계가 되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으니.)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아웃팅을 시키거나 강한 혐오를 표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그렇게만 안 해도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기 때문이려나. 극심한 혐오보다는 확실히 나은 반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이기만 하면 충분한가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적당히 만족할 줄을 모른다고 비난받더라도 딱히 입장을 바꿀 생각은 없다.


내 정체성을 애초에 드러낸 채 활동한 공간에서 만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는 대체로 사적인 관계에서 일정 이상 신용하는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해왔다. “일정 이상 신용한다는 것은 적어도 악의적으로 아웃팅을 하거나 그것을 빌미로 나를 협박하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미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이 예측은 대체로 옳은 편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저것으로 충분하지는 않고, 후속 반응을 토대로 더 신뢰하게 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예측대로였다 느끼기도 한다. 커밍아웃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건 나를 굉장히 신뢰한다는 의미일 것이라던가, 우리는 매우 절친한 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도 있다.

 

예전에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사적인 자리에서 절대 드러내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중 하나가 가십으로 전파될 법한 고민이나 약점이라는 내용의 리트윗을 보았던 적이 있는데, 퀴어를 포함한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가십거리가 되고 그것을 약점 삼을 수 있는 세상에서 절대그것을 털어놓지 말라는 조언에 동의하기는 어려웠지만 가십약점이라는 단어는 좀 유용한 면이 있다. 앞서 말했던 일정 이상 신용의 의미를 다시 설명해보자면, 나는 약점의 문제는 되도록 피하는 편이지만 가십은 어느 정도 감수하고 있다. 그것까지 예측하고 피하려면 커밍아웃을 시도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축소되기도 하고, 가십거리로 삼을 것이라 예상되더라도 커밍아웃의 이익을 고려하면 감수할 만은 한 짜증 거리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예전에 커밍아웃했던 한 지인에게서는 거의 나를 가십거리로 삼겠다는 선언처럼 들리는 말을 들었었는데, ‘나와 엮일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하겠다, 그건 피해가 안 가지 않느냐, 네가 불쾌하다니 자제는 해보겠지만, 술자리에서 취해버리면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같은 식의 이야기였다. 저 말이 나를 술안주(메뉴 이름은 익명의 바이섹슈얼 친구?)로 씹겠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딱히 내가 뒤틀려서는 아니지 않을까.

 




그가 실제로 나를 안줏거리로 사용했는지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그 말에 대한 철회 선언을 듣지는 못했다. (이제 와서는 애써 철회를 받을 마음이 들지도 않아서 이걸 글감으로 써먹는 걸로 대충 계산을 맞춰 볼까 싶다.) 어쨌든 그 지인도 본인이 그만하면 꽤 괜찮게 커밍아웃을 받아준 것이며 우리 사이의 신뢰 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착각을 교정해주려는 시도라면 이미 여러 가지로 해 보았지만 대단한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경우에 따라 가상의 존재이기도 한) 성소수자 지인을 가십거리로 삼아 본인의 다양성 높은 인간관계나 관대한 인격이나 신기한 지식의 보유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로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것을 볼 때면 과연 가십의 대상인 상대방(실존인물이라면)도 본인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을지 좀 궁금해진다. 나는 가십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당연히 이성애자 여성일 것이라 취급받는 것이 더 불쾌했기 때문에 커밍아웃한 것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건 감수할 수 있고 굳이 단속하기 피곤하기 때문이지 저런 행동을 한심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를 당연히 이성애자취급했던 사람에 대한 커밍아웃은 대체로 한 번으로 깔끔하게 끝나는 법이 없고, “양성애자니까 이성만 만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래도 결혼은 하겠지같은 짜증 나는 소리를 듣게 되곤 하지만 화내고 항의하고 설득하다 보면 아주 진전이 없지는 않아서, 최근에는 특별히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별로 없고 커밍아웃하고 나도 크게 달라질 일이 없을 사람에게보다는 오히려 저런 사람에게 커밍아웃할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고 있다. 대의적 차원보다도 내게 체감되는 변화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로도 커밍아웃을 한다. 내가 당연히 결혼할 것이라는 전제로 말하거나 내 연인의 성별을 토대로 내가 이성애자라 멋대로 추정하거나 그렇게 하고 다니면 남자들이 싫어한다고 타박하는 당신에게. 딱히 당신을 대단히 신뢰하고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좀 더 개선하기 위해서. 사실상 당신에게 지금보다 더 많이 화내고 항의하고 귀찮게 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써.

 

그러니까 딱히 당신을 대단히 신뢰해서 커밍아웃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글-게으른 집요정 집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