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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1호] 커밍아웃

[기획] 어떤 바이-폴리의 커밍아웃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바이-폴리의 커밍아웃


바이섹슈얼로서의 커밍아웃은 과거의 경험을 증빙자료로 가져오는 자기서사식 고백을 동반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지금껏 누구 누구를 만나왔고, 상대의 성별은 각각 어떠하였으며, 이전 연애사에서 나의 역할이나 특정 성별에 대한 욕망이 어떠했는지를 버무리는(?!) 말로서 바이섹슈얼을 가져오기도 한다. 과거 연애사를 '바이 정체성'이란 용어로 다시 의미화하면서 그 정체성에 타당한 근거로 쓰기도 한다. 설혹 그 사람의 개인사에서 바이다움(? 그런 게 있다고 치면)의 근거로 삼을 만한 경험조차 없다면 혹시라도 쏟아질 의심을 어찌 방어를 할지부터 바들바들 근심걱정하게 된다. "너 전엔 남자만 만났었잖아?" "너 예전에는 여자한테 끌린 적 없다고 하지 않았어?" 식의 질문 한 방에 후달리는 게 어쩌면 바이섹슈얼 커밍아웃의 일면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바이로서의 커밍아웃에서, "난 지금 이런 욕망이야"와 "난 지금껏 이렇게 누군가에 성애적으로 끌려왔고 만나왔어"는 서로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공시성과 통시성이 교차하는 공간이자 바이섹슈얼이라는 불확정적인 용어를 어떻게든 닻 내리려는 시도들은 불안을 야기한다. 즉, 행위의 근거가 만나왔던 상대의 (이분법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성별에 고착되는 수동성과 과거의 상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에 따라 현재의 상대에 대한 진심/욕망을 해석할 수 있을 거라는 조건부 확신, 그리고 이렇게까지 바이섹슈얼이란 커밍아웃에 과거를 구태여 꼭 복귀시켜야만 하는가라는 불편함이 줄곧 잠재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바이섹슈얼이면서 동시에 폴리아모리임은 위에서 말한 바이 커밍아웃의 속성에 특이한 예외가 될 수 있을까? 공시성과 통시성이 동시에 공존하면서 정체성을 확정지어 줄 예외로서의 상황이 말이다. 특히나 폴리아모리로서의 커밍아웃은 공시적인 고백을 동반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난 지금 이렇게 누군가에 성애적으로 끌리며 만나고 있어" 이런 욕망이 어떠한지를 버무리는(!?) 말로서 폴리아모리를 가져오기도 한다.


바이가 다 폴리는 아니겠지만, 그리고 폴리가 다 바이는 아니겠지만, "바이이니까 한 번에 다 만나는 폴리일 수 있겠네."와 "폴리이니까 성별 구분 없이 바이인 게 더 낫겠네."의 교차, 공존, 의존, 대립, 모순. 그러나 언뜻 보면 그럴싸한 상호적인 인과관계의 덫이 바이섹슈얼이자 폴리아모리인 이의 커밍아웃에 녹아있다. 그러면서 바이섹슈얼이 어떤 개념의 정체성인지(그런 게 있기나 한다면), 폴리아모리가 정체성인지(아니면 취사선택 가능한 선호적 행위의 묘사/상태에 불과한 건지),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의 기대치는 이미 정해져 있다. 막상 되돌려 받는 질문은 "전에는 누구를 만났고 지금은 누구야?"에서 "지금은 둘 다(both 남자 & 여자, bi-란 접두어는 생물학적으로 남녀를 지칭한다고 통용되니 이 규율에 따르라~!)를 동시에, 한꺼번에 사귀고 있어?" 인 게 현실이니까.


이 글은 그런 고민을 살짝 그집어내는 글이 될 것이다. 이 글에 실린 세 개의 에피소드는 우라즈(가명)라는 "바이섹슈얼이자 폴리아모리인 생물학적 남성"의 커밍아웃 경험들이다. 이 경험들은 실패한 커밍아웃일 수도 있고 동시에 미지근한 인정투쟁인 듯도 하다. 왜냐면 바이섹슈얼이란 정체성이 미적지근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폴리아모리가 부정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동반하여 거부당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현재 진행형의 행위가 동반되지 않는 폴리아모리 정체성이 바이섹슈얼 정체성까지 싸잡아서 차폐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한번 읽어 주시길.


# 이 에피소드들은 필자의 직간접적인 경험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일단은 픽션입니다. 그러니 곧이 곧대로 믿든 말든 읽는 이의 자유입니다.

# 등장인물은 주인공 격인 우라즈와, 그를 중심으로 그와 친밀한 사이인 베이키, 엘레나, 피나스 이렇게 네 명입니다. 등장인물들은 가명을 쓴 현실의 인물이거나 가상의 인물입니다.

# 바이섹슈얼(bisexual), 폴리아모리(polyamory) 등의 용어가 갖는 개념을 미리 알아두고 읽으면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됩니다. (필자가 좀 불친절한 사람인지라 자세한 건 생략. 정 궁금하면 검색을 생활화합시다!)



Episode 1. 게이 남성인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해 보았다


우라즈는 바이섹슈얼이고 폴리아모리로 정체화 중인 남성이다. 이전까지는 이성과 주로 연애 경험을 해왔는데 최근 들어서 바이섹슈얼로 정체화 중이다. 그리고 폴리아모리로서의 욕망이 있음과 앞으로 열린 관계의 성애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싶다는 생각을 이제 막 구체화시켜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얼마 전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게이 남성 베이키에게 커밍아웃을 시도해보았다. 몇 년 전 베이키는 우라즈에게 게이라고 커밍아웃했었다. 그만큼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겠다는 희망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라즈는 자신의 (바이-폴리로서의) 커밍아웃 역시 상대방에게 쉬이 전달될 수 있을 거고 베이키의 반응이 낙관적이리라 막연하게 예상했더랬다.

우라즈 : 저기 있잖아. 바이섹슈얼이라고 알아? 지금껏 내가 여성과 연애를 해 왔던 건 너도 알겠지만, 최근에 나 스스로를 바이 남성으로 정체화하면서 그렇게 나를 부르려고 해.

베이키 : 그럼 너도 이제부터 남자랑 박 타는 거냐? [웃음]

우라즈 : 음... 뭐, 꼭 그렇진 않을 수도 있는 거고.

베이키 : 아닐 수 있다고? 그런데도 바이인 거야?

우라즈 : 그리고 나 폴리(아모리)이기도 해. 한국말로 굳이 번역을 하자면 다자연애 혹은 다자간 연애, 뭐 그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걸. 물론 그런 번역이 정확한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말야.

베이키 : 아~ 그거 여러 사람 동시에 만나는 거지? 에이, 내 주변 게이들 중에도 여럿 만나고 있는 사람들 꽤 많은데, 뭘. 이 바닥에선 원나잇도 많이 하고, 누구랑 진지하게 오래 만나면서도 다른 섹파를 두기도 하고. 몰래 바람도 피는 경우도 있고, 오랫동안 만난 애인이 있는 기혼 게이도 꽤 있고...

우라즈 : 폴리아모리 중엔 짧게 만나는 관계도 있고 셋 이상이 다 같이 함께 지속적으로 만나는 경우도 있어.

베이키 : 그건 쓰리썸 같은 건가?

우라즈 : 한국에선 쓰리썸이나 스윙이 별로 좋은 의미로 쓰이는 말은 아니긴 하잖아. 단지 극단적인 문란함 정도로만 여겨지기도 하고, 또 되게 남자 중심의 이성애적인 이미지만 강하게 통용되기도 하고 말야. 근데 폴리아모리라고 하면 다들 그럴 거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 쓰리썸이나 포썸을 즐기는 폴리아모리도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폴리아모리스트들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덮어놓고 비난을 받아서 이중 삼중으로 시달리기도 하고 그래.

베이키 : 여튼, 바이라고 하면 당연히 폴리아모리겠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긴 하겠다. 사실, 여자 만나고 있다는 꼬리표 달고 있으면 게이 바닥에선 잘 안 팔린다, 너.


우라즈는 베이키와 대화하던 중, “바이라고 하면 당연히 폴리아모리”라는 말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두 용어의 정의나 범주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이고 깔끔하게 잘 전달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점은 감안하더라도, 바이섹슈얼과 폴리아모리가 각각 별개의 지점에 위치하는 정체성 용어란 생각을 우라즈는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바이섹슈얼은 “둘 이상의 성에 성적으로 끌리는” (이 정의가 맞냐 틀리냐는 다른 기회에 더 얘기해보는 걸로 일단 미뤄두자) 거니까 폴리아모리를 전제로 한다는 오해는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꽤나 넓게 퍼진 낭설이기도 하다. 바이섹슈얼 남성은 게이 남성과 달리,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만나야 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다른 차별점을 획득하게 되는 걸 테니까 그 특이한(queer) 정체성이 온당하게 게이의 욕망과 다른 차별점으로서 근거를 가지려면 “현재 시점에서 끌리는/만나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함께 만나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검증받아야 하는 거라 여겨지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과정은 베이키의 말처럼 “여자 만나고 있다는 꼬리표”일 뿐이더라도 말이다. 우라즈가 베이키의 반응에서 조금 답답하다 느끼는 지점은 지금 어떤 성별인 누구 누구와 동시에 연애를 하는가로 "마냥 게이인 건 아니라 그것과는 좀 다르게 구분되는 바이섹슈얼 남성임"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 때문일 거다.


Episode 2. 전 애인에게 커밍아웃을 해 보았다

엘라나는 우라즈와 이성애적 연애를 한 바 있는 전 애인이다. 현재 엘레나는 레즈비언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고, 지금 만나는 파트너와도 꽤 오래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엘레나는 헤어진 후에도 우라즈와 종종 수다 떠는 사이를 우지하고 있다(엘레나의 현재 파트너는 엘레나가 전 애인이었던 우라즈와 여전히 친한 사이라는 데에 좀 껄끄러워하는 눈치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라즈는 엘레나에게 바이-폴리로서 커밍아웃을 하겠다 마음 먹었을 때, “나를 잘 알던 친구이고/애인이었고 본인도 나에게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해 간 과정을 보여준 바 있으니 나의 이야기도 잘 받아들여줄 거야”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과거의 내 모습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인데, 이제 와서 바이니 폴리니 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행위가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질까?”란 우려도 함께 들었다. 이성애적 연애의 파트너였던 사람에게 이제는 자기가 바이 남성이라는 말이 과연 잘 전달될 수 있을까? 


우라즈 : 나 폴리섹슈얼이야.

엘레나 : 그게 뭔데?

우라즈 : 주저리주저리~ [베이키에게 설명한 얘기와 동일]

엘레나 : 단어들이 참 어렵긴 하네? 근데 너 나랑 만났을 땐 안 그랬잖아. 너 여자만 겁나 좋아했잖아.

우라즈 : 바이인 게 '여자 겁나 좋아함'과 반드시 모순되는 건 아니다, 뭐.

엘레나 : 음.. 그럼 이제는 남자랑 만나? 지금 누구 만나는 남자 있어?

우라즈 : 아니. 그리고 지금 내가 누구와 만나고 어떤 행위를 하는가로 결정된다기 보다는, 나에게는 그냥 바이로서의 욕망이 있다는 거지.

엘레나 : 복잡해~!! 남자랑 만나는 게 아니면 바이임을 어떻게 확인해? 나도 지금 애인 만나게 되면서 나에 대해 솔직해진 건데.

우라즈 : 그렇지. 그때가 나랑 사귀던 중 딴 년이랑 눈 맞았던 거였지요.

[그 당시 누가 더 잘 했네 잘못 했네로 5분 간 투닥투닥~~]

엘레나 : 어쨌든 이제는 남자랑 만날 생각도 있다니, 좀 놀랍기도 하네. 지지하고 응원하마.

우라즈 : 감사해요~

엘레나 : 그럼 이제 커뮤니티 같은 데도 들어가서 짝도 찾고, 게이끼리 찾아주는 어플도 깔아 쓰고 그러는 거야?

우라즈 : 게이들은 바이라고 밝히는 남자를 별로 환영 안 하는 분위기인 데다가, 난 그런 루트로 찾을 생각은 별로 안 들어서.

엘레나 : 그럼 만날 상대 찾기 어려울 거 아냐?

우라즈 : 반드시 남자를/남자만 만나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 누굴 당장 만나야 하겠다는 식으로 마구 급한 것도 아니고.

엘레나 : 에헤~ 근데 그럼 지금까지랑 뭐가 다른 건가? 걍 편하게 여자랑 헤테로 연애하면서 지내겠다는 거랑 같은 거 같은데?

우라즈 : (당황하며) 그니까, 아까 얘기한 거처럼 우선은 내 욕망에 솔직하겠다는 거고.

엘레나 : 뭘 해보지도 않을 욕망이 어떻게 솔직한 거야? 일단 남자랑 함 해 봐. 그럼 더 확실하게 알게 될지도? ㅎㅎㅎ~


누군가는 자신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 바이섹슈얼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기도 한다. 우라즈가 피력하고 있듯이 과거에 이성애적 연애를 했다 하더라도 그 경험이 현재의 바이섹슈얼 정체성과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재의미화되어 긍정적 기억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 긍정에의 욕구가 과거를 끊고 새로이 정체화하고자 하는 정체성이 암묵적으로 강제하는 규범과의 사이에 긴장을 유발하기도 한다. 무언가가 그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건 거창한 것처럼 들리는 정체성의 명칭으로서 소소한 일상의 맥락을 뒤덮으며 의미의 무게를 앞세워 은연중에 어찌 인식할 건지의 과정 속으로 침습한다. 그러면서 솔직한(?) 욕망이라는 자기 진실성은 검증되어야 할 외피로서 페르소나로만 기능하게 된다. 그렇게 정체성이란 이름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 이름과 모습으로 변신하며 재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의심케 한다. 검증되지 못한 정체성은 그 한계와 모순 속에서 죄스러운 마음도 들게 하다가도 원인 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라도 외쳐야 하나? "왜 정체성의 이름들은 이렇게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틀리기 일쑤냐고~~"

엘레나와는 이전에 이성애적이고 독점적인 연애를 했던 경험이 있기에, 자신의 과거 욕망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이이기에, 우라즈는 엘레나에게 커밍아웃하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 과거 나누었던 경험이 현재의 정체화를 거짓된 것으로 보게 만들진 않을지가 우려스럽다. 솔직히 말해 우라즈에게 있어서 “지금까지랑 뭐가 다른 건가? 걍 편하게 여자랑 헤테로 연애하면서 지내겠다는 거랑 같은 거 같”다는 엘레나의 반응은 망치로 얻어 맞은 것 마냥 충격이 크다. 그에게는 ‘어?? 정말 내가 그런 걸 수도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자책의 마음이 들었을지 모른다. 스스로가 바이섹슈얼이니 폴리아모리니 거창한 뭔가로 삶을 재구성하고 있다며 자족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면 이전과 다를 바 없다는 걸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면하며 말이다. 우라즈의 커밍아웃은 정말로 정체성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만큼이나 “확고한” 것일까? 정체성이란 건 확고한 것이(어야 한)다라는 신화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불완전해 보이는 우라즈의 정체화는 흔들흔들 불안하고 상처받는 과정을 쭉 거쳐갈다.



Episode 3. 썸 상대에게 커밍아웃을 해 보았다


피나스와는 바이로 정체화해가기 시작한 후 최근부터 우라즈와 가벼운 성적 텐션을 유지하면서 가끔 만나는, 소위 썸 타는 사이이다. 그치만 사실 우라즈는 ‘아마 안될 거야’의 심정이기도 하다. ‘바이인 거로 팽당하지는 않을까? 폴리아모리인 걸 나쁘게 보진 않을까? 이런 곤란한 조건을 다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는 사람이어야 뭐라도 시도해 볼 텐데”라고 말이다. 바이에 대해, 폴리아모리에 대해, 바이이자 폴리임에 대해 스테레오 타입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 커밍아웃이라고 무난할 수 있을 것인가?  


우라즈 : 저기, 나 폴리섹슈얼이고 폴리아모리야.

피나스 : 그게 뭥미? 먹는 거?

우라즈 : [폴리섹슈얼, 폴리아모리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기]

피나스 : 복잡하네. 어려워… 그건 바람 피는 거랑 다른 건가?

우라즈 : 바람 피는 것과는 다르지. 서로 합의 하에 하는 게 보통이고.

피나스 : 그러니까 우라즈는 현재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도 거기에 더하여서 다른 사람, 다른 남자와 사귈 거라는 건가? 지금 사귀는 사람하고는 서로 그런 얘기까지 나눈 거지...?

우라즈 : 애인과도 다 얘기해 봤지.

피나스 : 그럼 네 애인도 바이이면서 폴리이기도 한 거겠네?

우라즈 : 그걸 말하는 건... 왠지 아웃팅인데? 음... 꼭 그렇다고 단정짓기도 어렵고, 부정하기도 어렵고 그러네.

피나스 : 근데, 그렇잖아. 폴리아모리인데 바이가 아닐 수 없잖아.

우라즈 : 어… 응? 왜 그렇게 되는 건데?

피나스 : 그니까. 폴리가 너 말한 대로의 거라면, 폴리아모리이려면 바이섹슈얼이여야 하는 거잖아. 어쨌든 그런 다자간 관계는 세 명, 네 명 등등이 어울리는 건데 모두 다 동성으로만 구성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우라즈 : 꼭 그렇진 않을 수도 있는 거라 생각도 하지만, 너는 이런 거에 대해 생각이 어떤데?

피나스 : 뭐, 나도 그런 상상 안 해본 거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명에게 동시에 끌리는 것도 그럴 수도 있겠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지점 있고, 나도 한창 시절 땐 양다리도 해보고 당해도 보고, 오래 사귀다가 다른 사람으로 넘어갈 땐 엄밀히 말하면 바람 피는 상황처럼 되기도 하지만. 그게 정체성인지는 모르겠고. 잘은 모르지만, 모두가 합의하는 그런 관계를 상정하면 뭐랄까, 바이임이 폴리아모리임의 전제조건 같이 느껴진달까?

우라즈 : 그럼 넌 상상은 해봤지만 현재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인 거네?

피나스 : 아무래도 난 바이는 아니니까 폴리아모리도 아닌 거고. 그런 거에 다 해당 안 되는 거 아닐까 싶어.


흥미로운 점은, 베이키가 “바이이면 폴리”라고 말하고 있다면, 피나스는 “폴리이면 바이”라는 역명제를 던지고 있다는 거다. 피나스는 폴리아모리 혹은 다자간 관계의 구성원이 바이섹슈얼인 것은 이미 사전에 깔린 전제가 아니냐는 입장인 거다. 여기서 연애 구도 혹은 욕망의 관계망에는 사전에 특정 성적지향이 조건 지어져 있다는 입장이 노골화된다. 이성애적 관계에는 이성애적 욕망이, 동성애적 관계에는 동성애적 욕망이 구성원들에게 당연히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고 간주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폴리아모리는 단성애적(monosexual)이면 안 되고 바이섹슈얼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곤 하는 거다. 성별이 각기 다른 구성원들 셋 이상이 서로 합의하여 관계맺기를 하는 양태는 바이섹슈얼 정체성을 전제로 하여 존재 가능한 걸로 비치기도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피나스가 바람피우기를 언급한다는 점일 것이다. 바람피우기가 아니냐는 혐의와 현 파트너를 비롯하여 상대방들의 동의 여부를 묻는 것은 폴리아모리라는 정체성(혹은 행동 양태)이 윤리적인 실천인가라는 의구심을 바탕에 두고 있다. 비윤리성 여부는 바이섹슈얼과 폴리아모리를 매우 유사한 지점에 놓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윤리적 비난의 한쪽에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현재의 연인과 다른 성별로 훌쩍 떠나가버릴지도 모르는, 믿을 수 없는 존재로서의 바이섹슈얼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한 사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사람에게 찝쩍거리고 연인을 속이는 행동을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며 자기합리화하는 존재로서의 폴리아모리가 있다. 신뢰와 헌신을 바탕으로 하는 고귀한 사랑의 담론에 있어서 바이섹슈얼과 폴리아모리는 적절치 않는 것들이자 지속불가능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각이 널리 존재한다. 그러면서 이런 욕망들은 일시적 일탈이거나 이기적이기 때문에 행하는 잘못이거나, 나아가서 언젠간 사그러들 욕망쯤으로 간주된다. 이런 욕망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정체성으로서의 바이-폴리 커밍아웃 경험은 커밍아웃을 하는 이에게, 그리고 이를 대하는 이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커밍아웃의 효과를 우리는 내심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바이-폴리로서의 이중 커밍아웃은 종종 불완전하다


“나는 OOOO야”라고 바이섹슈얼로서, 폴리아모리로서 커밍아웃을 한다. 이 말을 내뱉을 때 무엇을 전한 것일까? 전해진 것일까? 만약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면, 다음에 만회할 기회가 있는 것일까?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먼저 나 스스로조차 나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긴 할까?


앞서 나온 세 번의 커밍아웃 에피소드는 어찌 보면 성공적(?)이다. 우라즈가 전하려던 얘기는 상대에게 나름 잘 전해진 거 같기도 하다. (뒷 이야기이지만, 에피소드의 경험 이후로 지인들이 우라즈의 정체성을 폐제한 채 관계가 어그러졌다거나 “마치 그런 일은 없었어” 식으로 무시당하는 경험을 겪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 한켠 밑바닥에는 ‘이건 아닌데’ 싶은 무언가가 웅크리고 남아있다: 

“바이-남성의 커밍아웃이 앞으로는 남성을 만날 거라는 걸로만 통하면 되는 건가? 폴리-남성의 커밍아웃이 바람피움의 공개적 정당화 정도로 간주되어버려도 무방한가? 바이-폴리인 사람은 바이이기 때문에 당연히폴리아모리인, 혹은 폴리 때문에 당연히 바이섹슈얼인 사람으로 이해되어도 무방한 건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대화들이다.


앞의 세 에피소드들에서 바이 남성으로서의 커밍아웃은 공통적으로 첫 순간부터 "그러면 이제 남자 만나는 거냐?"는 질문에 대한 해명하기로 문을 열곤 한다. 바이 남성으서로서 우라즈의 커밍아웃은 "이제부터 gayness도 함께!"라는 선언으로 번역되어 받아들여지곤 한다. 바이 커밍아웃의 포인트는 "이제부터는 동성도 만날 거야"로 일단 해독된다. 그리고 난 후 거기에 더해 동성이 아닌 다른 성별과 만났던 경험이 버무러지곤 한다. 꼭 동성을 만나겠다는 선언인 것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 그렇게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라는 복잡다단한 심정을 납득시키기란 당최 쉽지가 않다.


"바이섹슈얼이면서 폴리아모리이기도 함"를 이중 커밍아웃(dual coming-out)하기는 때때로 정체성을 단순한 행태의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바이이면 당연히 폴리아모리인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꽤 있는데, 
"둘 중 하나가 다른 것의 전제가 아니기도 하고, 두 개가 꼭 분리되는 것도 아니지만, 둘이 같은 것도 아니다"는 뜻 모를 설명을 주절주절 한다고 해서 그 속내를 쉽게 납득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설명을 한다고 해도 단지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치부된 채, 비윤리성을 이유 삼아 폭력적 대우를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어쩌면 커밍아웃이란 건 한 번에 하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만 하는 게 낫겠다고까지 씁쓸히 타협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체성들이란 게 개인 안에서도 여럿 뒤섞이는 게 너무 당연한 현실에서, 그걸 뚝뚝 분절시켜 따로 전달하여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러한 난맥 속에서, 대체 바이-폴리-남성으로서의 커밍아웃이란 항상 이렇게 미진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건가라는 위화감 들게 하는 것도 사실이니… 그러나 뭘 어쩌랴.


*글-냥이성애자로 알려진 주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