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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호] 아무거나

[기획] 바이는 누구, 양성애는 어디?





* 이 글을 통해서 나는 감정을 배설할 것이다. 이번 호 웹진의 주제어처럼, 바이섹슈얼을 아무거나 정도로 취급하는 것들에 대해 욕설 아닌 욕설을 할 것이다. 누구라고 콕 집지는 않겠지만 "바로 너 말야, 너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를 내뱉을 것이다.



그날, 시청에 바이는 있었는가?

2014년 12월 나는 겨울 서울시청 로비의 한 켠에 앉아 있었다. 서울시인권조례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가 있던 과정에서 많은 성소수자들, 무지개 농성단이 시청 건물 1층의 로비를 점거한 자리였다. SNS 상으로 이른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농성단을 해산하려는 시도가 있을 거란 소식을 날마다 접하며, 내 생활 패턴은 원래 올빼미족이니까 괜찮다는 핑계를 대면서 밤 막차를 타고 찾아가서 "오늘 아침도 무사히"를 확인하고 오전에 나서기를 사흘, 나흘….

벌써 곧 있으면 1년 가까이가 되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내게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둑한 로비 곳곳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하고 둘러 앉아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러다가 아침에 다들 잠이 깰 때쯤엔 하루를 시작하는 소식의 공유가 있었고, 개개인들 혹은 어딘가에 속한 누구로서 지지발언이 있었다. 드문드문 서울시장이 농성단의 대표(?)들과 면담을 하기로 했다느니 무산되었다느니 아니 이제 곧 만날 거라느니 등의 소식이 오고 갔다. 시청 로비의 천정에는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었고, 사람이 앉은 공간을 둘러싼 곳곳에는 각자가 손으로 쓴 피켓 수십 수백 장이 줄지어 놓여 있었으며, 벽과 기둥 중 허용된(?) 공간 곳곳에는 거의 빈틈없이 자보와 피켓과 무지개 색색의 깃발천이 부착되어 있었다.


2014년 12월 당시 시청광장 로비에서 찍은 사진


다들 아다시피, 그 며칠의 투쟁은 성소수자 운동 진영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승리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원한다, 권리를/사랑을/변화를. 야~!”라는 대표 구호로 상징되는 농성장에서, 누군가는 승리 선언을 목청껏 외쳤으며, 앞으로의 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점치기도 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목소리도 있었으며, 예전과 - 여기서 예전이라 함은 2007년 차별금지법 사태가 처음 터졌을 때의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건물이나 서울시학생인권조례 때의 시의회 별관이라는, ‘모여 있음’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내겐 기억된다 - 는 다른 형태의 내부 의사소통과 의견수렴의 과정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있었다. "예전과 다른 분위기였다." 숫자가 확 늘었나? 그럴지도 모른다. 세력의 규모와 법제화 투쟁의 전략이 바뀌었나? 그럴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다채로워졌나? 그건 또 그럴지도 모른다. (당시의 기록을 담은 무지개 농성단의 백서가 조만간 나올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 백서 안에 누가 함께 그 공간에 있었으며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상세히 담길 수 있길 바란다.)

당시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내 머릿속을 종종 울린다: “시청 로비에 바이는 있었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려 퍼지던 구호 “우리는 원한다, 야!”의 우리가 누구까지일까 란 불순한 의심을 하면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써 놓은 피켓 문구에서, LGBTAIQ로 불리는 호명 속에서 분명 문자(B)와 음성([bi;/bai;])으로서의 바이는 존재하였다. 그런데… 왜 그 장소에 바이가 존재했다는 체감이 나에겐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거기 있었다. 그 자리에는 소위 바이섹슈얼 "당사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흔적이 있었고, 발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무게는 가벼웠다. 너무너무 가벼워서 훅 불면 사라진다 하더라도 별 문제가 안 될 정도로 가벼웠고 흐릿했다. 로비 구석에서 붙어 있던, "안녕하십니까, 저는 바이섹슈얼입니다.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손자보가 마치 신기루였기라도 하는 마냥….

http://queerarchive.org/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사진류] 게시물 분류 ID 1338번

 

한창 농성이 진행되고 있었던, 농성장을 고수하여 장기화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방법을 택하는 게 현실적이냐는 식의 전술적 논쟁이 조용조용히 언급되던 때였다. 그때 누군가가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동성애자의 투쟁을 통해… 동성애자의 승리가 되기 위해선…" 식의 표현을 쓰며 논의를 펼치고 있었다. 그에 대해 다른 이가 "이 자리에는 알파벳 L, G~ 뒤에 붙는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간성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으니 '동성애자의~'라는 수식 말고 '성소수자의~' 정도로 표현하자"고 이의 제기를 했다. 머쓱해하던 상대방은 알겠다고 했다. (그 모습이 잘못을 지적당한 후 "뉘에뉘에~"하는 꼰대 개저씨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 보였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못돼 먹은 편견 때문일 거야. 열심히 반성해야지~ 그리 지적 받은 얼마 후에 또 "동성애자의~" 운운했던 건 그 사람이 잘못이 아니라, 내 심뽀가 배배 꼬여 있어서 그렇게 들린 거 뿐일 거야. 설마! 그 사람이 얼마나 올바른 사람인데 말야!!) 심지어는 "그런데 바이들은 레즈비언/게이 운동에 무임승차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자기들이 나서지 않으니까. 그럴만한 단체도 모임도 없고, 목소리를 낸 적도 없는 게 사실 아냐?"라는 식의 반론과도 마주한 바 있다. 이 말에 깔려 있는 전제는 이런 것이리라. "너네(바이섹슈얼들)는 운동 세력으로 집단화되지 못했고, 현재 그럴 능력도 없어 보인다. 또한 너네들이 겪는 문제의 포인트 역시 동성 간 관계에 대한 인정투쟁이니, 동성애 운동의 큰 틀에 들어가도 무방하거나 그 하위 범주에 있어도 충분히 목표한 바는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말뜻을 이따위로 밖에 못 알아먹는 건 역시 내가 못돼 먹어서인 걸까?


2015년 9월 23일, 헬게이트가 열리나니…

매년 9월 23일은 바이 가시화의 날이다. 뭐, 서구의 명절(?)이라지만, 그 나름의 의의는 있다 하겠다. 별로 웃기지도 않는 얘기로 썰을 풀어보자면, “September 23”이라는 검색어로 찾아보면 종말에 대한 글을 다수 볼 수 있다. 모 종교 단체에서 심판의 날로 지정한 날짜가 2015년 9월 23일이라나 뭐라나…. 물론 별 일 없이 지나간 하루였고, 나의 트위터 타임라인에서는 "#나는_바이섹슈얼이다"라든지 "나는_바이섹슈얼을_지지한다" 류의 해시태그 잔뜩인 글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그런 문구가 넘쳐났다고 해서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았다. 뭐, 바이섹슈얼의 존재가 가시화되고 집단의 목소리를 낸다면 누군가에겐 헬게이트가 열리는 걸 수도 있었으려나…? 이미 세상은 망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인지 세상이 오피셜하게 망하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여튼 바이 가시화의 날을 맞아 외치는, 바이 삭제(Bi Erasure)와 바이 비가시화(Bi Invisibility)에 대한 문제제기는 늘 다음과 같은 구호와 함께 한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가해지는 바이의 비가시화와 스테레오타입뿐만 아니라, LGBT 커뮤니티 내에서의 비가시화도 없어지길 바란다." 존나 정치적으로 정제된 단어를 쓴 표현이긴 한데, 이 문구에 담겨 있는 빡침이 과연 읽는 이들에게 잘 느껴질는지 모르겠다. 난 저 문구를 볼 때마다 "욕이란 저렇게 점잖게 해야 맛이 나는 거쥐"라는 생각만 든다. 그리고 비가시화를 행하는 이들, 즉 저 표어를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는 "주류(!) 성소수자 집단과 그들의 활동”이 상당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라는 사실이 지난 수십 년간 크게 변하지 않아 왔다는 점에 또 한 번 주목하게 된다. (서구의 논쟁사를 모델 삼는다고 하여 사대주의적 발상이라 욕을 해도 별수 없긴 한데,) 언제나 성소수자 이슈를 선도(!)해온 서구의 흐름을 5~10년 후 뒤따르는 '퀴어 후발주자'인 한국의 상황은 조만간 저 이슈를 전면적으로 만나는 날이 곧 도래할는지도 모르겠다 이거다. (내 미래 예측은 맞은 적이 없으니, 저 정도로 논란이 일어나지도 않을 거 같긴 하다. 뭐, 그런 일이 있기야 하겠어? 한국은 워낙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가 강한 문화이니, 바이섹슈얼도 잘 보듬어 안고 잘 이끌어가 주겠지… 근데, 누가??? )


사진 출처 : http://www.bivisibilityday.com/


맘속으로는 "바이의 비가시화"란 화두는 이미 나올 만큼 나와서 진부한 것이고 (간신히 읽을 수라도 있는 외국어가 영어 뿐이라서 영어권 중심이긴 하지만…) 해외에서도 수십 년째 얘기되어 오고 있어서 이젠 낡은 이야깃거리가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서 "한국에 맞는 이슈를 발굴(!!!)해야 하는데… 끄응~~ ㅠㅠ"이라는 되도 않는 고민으로 귀결되곤 하는 것이다.

근데 말이다. 이게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이야기 나와서 이젠 식상하든 철지났든 뭐라 부르든 간에 여전히 내 삶과 주변에서 현재진행형인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나에게만 이 화두가 진부한 것일 뿐,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와 환경은 바이 비가시화란 척도로 따져봤을 때 그리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 나쁘게도 가식적인 반응이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이 되어 왔다: "아차! 그러고 보니 바이도 있었지…? 그럼, 그럼, 이리 와, 너네도 끼워줄게. 너 요새 바이모임이란 곳에서 뭐라도 하고 있다며? 그러면 자리 마련해줄 테니 큰(?) 판 와서 한 마디 해봐봐~" 막말로, 원치도 않는 우쮸쮸를 당하며 사는 기분인 것이다.


바이야깃거리(bistory)는 들러리가 될 뿐

간혹 바이모임의 이름으로 행사나 토론에 발언이나 참석을 해주길 요청하는 섭외가 들어올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이 많지는 않다. 아주 가끔씩이다.) “여성 성소수자가 모여서 의제를 만드는 자리인데, 바이 쪽에서도 나와주면 좋겠다”라거나 “국제적인 인권 논의 자리에 한국의 바이섹슈얼이 어떠한 처지인지 알릴 기회이니 와서 얘기를 더해주면 좋겠다” 라는 요청들 말이다. 그런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바이모임 웹진의 편집진 멤버들은 고민고민을 하다가 고사를 하곤 한다.

그나마 바이모임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제안이라면야 누군가와 함께 논의라도 할 수 있다손 치지만, 개별적으로 들어오는 제안인 경우에는 다음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머릿속에서 싸움을 벌인다. "뭔가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 vs. "그런 들러리 요청에 응할 생각이 없다"는 생각…. 들러리라는 표현이 좀 과하다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없기도 하다. 그런 요청들에 대하여 가장 먼저 머리에 똭 뜨는 생각은 이러하니까: “바이섹슈얼의 이야기는 동성애 서사의 아류가 아니다, 알긴 하냐?!” 그리고 내가 취하는 공식적인 입장은 이런 식이다: "대변할 의사도 자격도 없는 이에게 대변할 권한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그런 자리에 방청이라도 꾸역꾸역 가거나 굳이 다녀온 사람을 붙잡고 후기를 귀담아 듣곤 한다. 페미니스트의 입장으로, 퀴어의 입장으로, 트랜스 활동가의 입장으로… 보고 들어보려 애써 본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바이의 입장만을 유보해둔 채 그 자리에 앉아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나로 하여금 이러한 내적 분열을 겪게 하는 건 누구를 탓해야 하는 일일까? 분리불안을 겪는 내 정체성을 억지로 떼어놓고 아닌 척 그곳에 나가야 하는 슬픔 때문일까?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겨서 그런 자리를 갈 때면 일단 인상부터 쓰게 되곤 한다. 내 양미간의 내천자 주름은 순전히 그 때문에 생긴 거다~! (웽??)

체감하는 경험의 결이 다르니 고민의 결 역시 다른 건 당연하다. 바이섹슈얼이라서 겪어야만 하는, 눈에 띄는 차별적 시츄에이션이 게이나 레즈비언이 겪는 경험과 어떻게 다를지를 주저리주저리 얘기 털어놓을 수는 있겠지만… 이를 명료한 의제의 거리로 만들어야 하는 국면이 오면 '동성 간 연애'를 수행하는 이들이 겪는 차별로 환원될 때의 위화감은 명징하게 논해지지 못한다. (연애 행위와 성적지향은 다른 거라 구분 지으며 성적 지향의 정체성을 언어화 해왔던, 이미 종료된 바 있는 논쟁은 어째서인지 바이섹슈얼의 존재 여부를 물을 적마다 다시 소환된다.) 아니, 그 위화감의 틈을 채우기 위해 개개인 바이들의 경험의 서사를 맘껏 동원하여 전유할 용기조차 섣불리 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로서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한 시도로서 "바이 말고 차라리 레즈로 살걸"이라거나 "남자 바이란 건 없어, 결국엔…" 라는 발화들의 속내를 분노와 슬픔 없이 올곧이 들여다 볼 용기조차 쉬이 나지 않는다.

그뿐 아니다. 바이섹슈얼로 커밍아웃한 누군가가 토론이라는 이름의 배심원석 앞에 나와 바이 입장을 대변해달라는 그런 제안은 제안자들이 애초에 목적하는 바에 커다란 방해가 될 뿐이다. (아이구야~ 그들은 '바이 "당/사/자"가 용감히 대중 앞에 나와 달라'는 자신들의 요청이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걸 알지 못하나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바이의 비가시화에 대한 저항과 문제제기는 바로 제안자 같은 이들에 대한 비토이자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이다. 과연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각오하고서 초청장을 보내는 것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바이섹슈얼은 벽장 바깥(?)에서도 철저히 왜곡되고 비가시화 되어 있지만, 동시에 성소수자 집단 내에서는 더욱 교묘하고 올바른 듯한 언어로 비가시화 되고 있으며, 안팎 양측의 비가시화는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기까지 한다는 비판을 과연 감내할 것인가? 그들은 자기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그러한 목소리까지 함께 아우르면서 그 토론장을 의미 있는 자리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가? 그 모순과 갈등을 내적 동력으로 삼으며 진행해 나갈 만큼 그들의 '모든 성소수자의 인권 향상'이라는 테제는 튼실한가?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경고(?)의 메시지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가 보다. 존재도 비가시화 되지만 메시지마저도 비가시화 되는 것 같다. 메시지를 들을 이 없으니, 메신저만 과장되어 강조될 뿐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 아닌가? "유별나고 특이하며 조금은 신선하기도 한, 더하여 말도 잘 하고 유머러스 한데 활동판의 분위기에도 빠삭한, 게다가 관련 이론을 전공한 학력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인 (바이섹슈얼) 당/사/자의 등장…. (*주의 : 괄호 안의 단어는 뭐로든 대체 가능함)"


까칠한 궤변(=쾌변=대변) : 템포가 다르다

템포가 다르다… 란 고민에 더더욱 빠져드는 요즘이다. 한때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바이섹슈얼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활동단체가 없어서, 혹은 바이섹슈얼들만 잔뜩 모여있는 당사자 커뮤니티가 딱히 괜찮은 곳이 없어서, 집단으로서 구성되지 못해서 목소리를 못 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단체나 커뮤니티의 부재가 분명 일정 정도는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만, 그걸로만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여실히 느끼곤 한다. 바이섹슈얼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다른 정체성 집단의 차별 경험에 준하여 측정될 때, 서로 다른 템포로 인해서 많은 것이 깎여 나가버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 설령 대표라 칭할 만한(누구도 특정 단체를 대표로 선발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주체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결국 아류의 아류로서 역할을 배정받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환영 받기 어렵겠다. 심지어는 소위 ‘이 바닥’에서 함께 연대하며(오~ 연대… 수십 년째 활동판에서 최고선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여!) n분의 1로서 당당히(?) 한 자리를 꿰찬다고 할지라도, 작금의 상황에 그냥 B라는 글자 하나를 더하는 것에 그치는 거라면 그것은 그저 공백을 가리우는 무언가가 될 뿐일 것이다. B는 없어도 그만이나 뭐라도 있어서 채워줘야 하는 그런 것이 된다. “예전엔 뭐라도 있어서 채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잖아? 그만큼 더 가시화된 거고 발전(!!)한 거지”라는 걸 그나마 나아지고 있는 부분이라 자위해보곤 한다. 씨바, 존내 슬프다, 그지?

왜 이런 거에 이리도 화내는지를 이해 받지 못한다. 종종 행사의 자리, 축제의 자리, 규탄의 자리, 투쟁의 자리에 참석하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그곳에 어떤 정체성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혼자 되묻곤 한다. 어차피 그 어느 공간에서도 바이섹슈얼 의제를 말할 공간, 여유, 틈조차 없는 거 잘 안다. 왜냐고? 당장 눈에 띄는 확연한 사건/사고도 딱히 없고 차별과 혐오의 의제도 별달리 없거나 이성애중심주의/성별이분법 비판의 의제 안에 다 포함되는 얘기로 퉁칠 수 있는 거고, 또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바이섹슈얼들, 저리 가!"라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 왜 화가 나는지, 무엇이 슬픈지 스스로도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그 이유를 딱히 말로 표현하기도 쫌스러운 거 아닌가 싶어서, 혹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주저주저하곤 한다. 그런 고민 밑바닥에 늘 깔려 있는 정서는 이러한 상황과 환경에서 늘 지내다 보니 생겨나는 트라우마는 어느 결엔가 내 피부 깊숙한 곳에 끈적끈적 들러붙어 있어서 날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이리라.

템포가 다르다. 심지어 정체화의 템포도 다르고, 모여드는 템포도 다르며, 활동의 의제로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템포마저 다르다.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이 바닥은 그렇게 획일적인 템포가 강요 받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곳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단체나 모임 등 집단의 대표체 역할을 할 법한 집단에 요구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 템포의 다름이 무엇인지 역시 보일 것이다. "이 급박한 시국에 이미 구축된 틀이 기 존재하는데 바이섹슈얼 섹션이 여기 빈 자리로 빠져 있다. 지금껏 우리가 대신(?) 이 섹션을 맡아왔지만 너네 당사자 대표가 있으니 이제는 너네가 맡아라." 템포의 차이는 상대적인 거라서, 한번 그 물결 속에 들어가면 쫓아가기 급급하리라는 게 너무 뻔히 보인다. 속 빈 강정이라도 좋으니 '바이섹슈얼이 함께 한다’는 당위성이 우선인 것이다. 실제로 이런 방식의 흐름이 지속될 경우, 정작 바이섹슈얼 운동의 자생적 성장과 활성화는 더더욱 어려워질 거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게 혐오의 시선과 다를 바 무엇이랴? (그 정도 가지고 혐오라는 표현을 쓰는 건 과한 거 같다고? 그렇게 존재를 지워버리는 걸로도 모자라 탈취해버리는 행위 자체가 혐오라고 이론화 해온 역사가 바로 퀴어 이론과 운동의 큰 줄기였단 점을 상기하자!) 이렇게 은따를 할 바엔 차라리 그냥 왕따를 하란 말이다.

"안심하세요. 언젠간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그 요청들에 응하는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모르죠. 근데 전 아녜요, 빠이~"


동성결혼 이야기로 물타기 하지 마라, 당신이 글러 먹은 거다

요즘 핫한 이슈 중 하나는 동성결혼 합법화이다. 이 화두 역시 미국 연방 차원에서 통 크게 동성결혼을 허용하면서(허용이나 합법화란 말이 법리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점이 있지만, 대중에게는 허용 혹은 합법화 정도로 알려져 있는 현실이니 시류에 따르는 표현을 그냥 쓰겠다), 이제 세계 곳곳에서 - 한국에서도 - 동성혼과 동성결합 법제화 의제는 성소수자에게도 평등한 시민권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관련한 소송과 캠페인이 진행 중이기도 하다.

우선 동성결혼 및 결합 합법화/법제화에 대한 나의 개인적 입장을 밝혀둔다 : 되면 좋다. 좋다는 건 내게 좋다는 게 아니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그 권리를 절실히 원하는 몇몇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 좋다는 거다. 그런데 그에 대해 동의하는 순간 전적인 동의로만 받아들여지는 건 문제다. 동의의 의사 표시가 나 자신이 바이임을, 바이로서의 실존적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싸그리 버리라는 것과 진배 없는 식으로 대하지는 말란 말이다. 난 바이로서, 비혼으로서, 폴리아모리스트로서, 트랜스 활동가로서 동성결혼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걸 내 편 네 편 중 하나로 가져가서 “법적 혼인을 원하는 동성애자”의 입장으로 홀라당 바꿔치지 말라는 거다. 성소수자 집단 안에 동성애자만 있는 거 아니니까…. 찬반의 동전 던지기를 하지 말라. 반대를 혐오로 퉁치지 말라. 찬성이 아니면 악인이 되게 만드는 그 비겁함이 글러 먹었다는 거다.

작금에는 동성결혼 이슈가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노력하여 만들어오던 가족구성에 대한 권리에의 다양한 고민을 쳐묵쳐묵 하는 모습을 목도한다. 비혼 담론의 풍부한 서사 따위 개무시하며 시민권적 동화주의로 환원하는 모습을 목도한다. 그 와중에 욕망이 단일 대오로 집결할 것을 반강요 받기도 하며, 누군가의 승리가 모두의 승리로 둔갑하는 것도 목도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거냐고 반론하여도 대세가 그러한데 어쩔 수 없잖냐는 으쓱거림을 답변으로 듣는 기분을 겪는다. 대세엔 따르라는 식의 그런 태도가 글러 먹었다는 거다.

동성결혼 이야기는 현재 스코어, 한국 내 퀴어운동의 틱(tic) 같은 거다.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알~ 알기에, 이러한 면피용 단서를 달며 글을 이어가려 한다: 결혼을 원하는 이들의 욕망을 무시하려는 거나 그 요구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러한 요구를 하면서 나의 욕망을 무시하는 행위에 반대하는 거다. 그리고 현실이 개차반이니 제도화 투쟁을 위해 협상이 필요하다는 점도 안다. 그러나 그 협상의 거리로 나의 존재를 탁자 위에 올려두지 말라는 거다. 당신이 말하는 승리를 위해 많은 이들의 참여와 연대가 필요충분조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조건부 동의, 비판적 찬성의 다양한 입장을 한 덩어리로 버무려 획일화된 목소리로 만들지 말라는 거다. 내 목소리를 훔쳐가지 말라. ‘네 것은 우리 것이니, 고로 내 거’라는 그 오만함이 글러 먹었다는 거다.

동성결혼 합법화 과정을 거쳐가면서 어쩌면 퀴어운동의 많은 부분이 변화할 것이다. 그게 반드시 긍정적일 거란 희망찬 미래만 말하지 말아달라. 얻는 게 있으면 당연히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 않겠는가!


보수적 퀴어운동, 드디어 한국에 상륙!?

말한 김에, 퀴어운동이 앞으로 어찌 될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우려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몇 가지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을 해보련다. (내 주제에 전망씩이라니…. ㅠㅠ 나의 전망과 예측은 맞는 적이 없다고 이미 말 했던가?)

모든 활동은 각자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거니, 그 입장의 차이에서 나오는 욕망의 간극과 절실함의 온도 차는 어쩔 수 없는 거기도 하다. 문제는 여타의 다름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성소수자 운동은 "다름을 인정하라"라는 구호 하에 뭉쳐왔지만, 이때의 다름은 헤테로/시스와의 다름(=호모섹슈얼/트랜스섹슈얼로 통칭!)만을 뜻할 뿐, 내부(라는 게 있다면)의 정체성 간 차이나 각각의 개별적 차이는 경시되거나 심지어 무시된다. 기시감이 있지 않은가? 그러한 차이는 주된 의제에 비하면 부차적이니 일단 무시하여도 큰 탈이 없으며 나중에 차분히 논할 수 있다는 방식…. 한때는 '우리'라고 퉁쳐 불러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시절에서 더 이상은 그럴 수 없는, 그럴 수 없기에 슬슬 몇 년 전부터 낌새가 태동하던 위계화 구조가 고착되고 확대되는 국면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걸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회적 체계 안에 살고 있으니, 규범을 만들고 규범에 갇히는 존재이다.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 동등하게 결혼할 권리, 혐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의 명시는 규정의 실효성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담론에 균열과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시도이다. 그러나 규범은 무언가를 빈 곳으로 놔두지 않고서는 성안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 한계가 필연적인 속성이라 할지라도 그 한계를 인지하며, 한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설득과 토론을 지속하고, 그 한계 때문에 욕 먹을 각오를 하며 진행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 각오가 없이 진행되는 거라면 그 자체로 제도적 접근성을 획득한 이들의 위계적 폭력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이때 규범의 명목적 의도는 어쩌면 사실상 별로 중요치 않기도 하다. 규범 형성 과정에서의 절차적, 형식적 완결성만큼이나 담론적 파생력을 고민해야 하고, 규범 적용에서의 효과성 만큼이나 필연적이고 모순적인 억압성을 감수해야 한다. 법이란 구제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또한 폭력적이지 않을 수도 없는 거다. 쓰여진 문구를 현현한 체제와 이를 실천/수행하는 주체들에 따라, 또한 예기치 못한 요소들의 영향에 따라 단지 그 정도가 달라질 뿐이다. 현재의 법제화 운동 방식은 구제와 폭력 사이 그 어딘가에서, 혹은 양 절벽의 턱에 발을 아슬아슬 걸치고서, 아직은 욕을 안(or 덜) 먹고 있는 상황에 있으면서 앞으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지 못한 채 마냥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활동판에서 연대란 언제나 중요한 화두였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옛날 옛적 문민 정부의 '세계화'를 기억하는가?!) 국제 연대란 또 다른 형태의 다름과 다양성이 다른 방식과 네트워킹으로 공존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한국의 퀴어운동이 이러한 국제적 연대에 대한 필요성을 최근에야 - 특히 이에 대한 필요와 효과를 절실히 느꼈던 경험으로 많은 이들이 2007년의 법무부 차별금지법 사태를 언급하는 이도 있다 - 절감하고 이에 대한 많은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국내에는 힘이 모자라니 외부의 권위를 가져와 압박용 무기로 쓰겠다는 방식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콘택터에게서 취사선택된 이국적 아젠다가, 역시 번역자의 뉘앙스를 통해 전달되고 유포됨으로써,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 분야의 언어에 익숙한 엘리트들이 국내의 상황을 평가하고 재단함으로써 논지와 이론을 생성해내고 그 논지와 이론을 근거로 향후의 활동의 방향성이 구성되고 제도가 공표되어 간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새 세상은 누군가에겐 발전된 세상이겠지만 동시에 아주 느린 속도로 다른 누군가의 목을 졸라올지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들을 아울러 지칭할 별다른 말이 딱히 안 떠오르니, 이 글에서는 일단 "보수적 퀴어운동"이라 부르겠다. (어디선가 이렇게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야, 니가 그리 말해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 지금껏 한국에서 “퀴어적=급진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퀴어운동이 보수적일 수 있다는 표현 자체가 생소하기까지 하다. 솔직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이게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패러독스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지난 수년간 퀴어운동에서 퀴어함은 바로 인권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성소수자 인권=모든 인권의 바로미터" 패러다임은 가장 강렬하고 직설적이며 효과적인 구호이자 전략이 아니었던가?

나 역시 이에 대해 이의를 달고 싶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어렵게라도 이 얘기를 꺼내는 건 활동가들에게는 입버릇처럼 관용구가 되어버린 "성소수자 인권=모든 인권의 바로미터"가 포괄적 테제로서 너무 관용화되어 최고선으로서 건드릴 수 없는 무언가가 된 건 아닌가 라는 불안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저 구호를 우선시 부르짖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뿐만 아니라 구호가 공허해져버리면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거다. 정작 본인이 그 차별의 가해자이기도 하다는(단지 될 수도 있다는 자기 성찰을 넘어서서, 불가피하게 모두가 피해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 사실을 공허한 말로만 남기지 않기 위해 뭘 어째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cf. 그런 면에서 진정성과 감수성이란 말은 수십 년째 활동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음에도, 그 말 자체가 공허하거나 구호로만 그칠 경우의 위험 또한 경험치가 쌓여왔다고 볼 수 있겠다.)

더 극단으로 간다면, 마치 동성결혼에 대한 일부의 입장처럼 파쇼적이라고까지 보일 만한 시각을 강요하는 판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파시스트 퀴어’라고 불렀다간 그런 게 어딨냐며 되려 욕을 먹겠지?) 물론 아직 한국 퀴어판이 그 정도로 개막장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늘 사이가 좋기만 하면, 혹은 좋아야 한다고 강요하면 그게 바로 파시즘적인 거지 않나? 그래서 이 운동판이 직접적 의사표시가 아닌 대표체와 대변의 방식을 택할 만큼 커졌는지, 그 관계가 늘 공정하고 올바르며 민주적일 수 있을지 자문해본다. 만약 그러하다면 과연 그것은 성장인지 아닌지도 묻게 된다.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꺼내는 가장 큰 이유는 퀴어 커뮤니티와 퀴어 활동판 역시 위의 얘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 와중에 자기연민하는 바이가 살아남기 : "존재는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거다 : "혐오와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관통되는 수년 간의 한국 사회 퀴어인권운동 내에서, 바이는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가?" 단체와 경력 활동가, 상근자의 유무로 유효함이 판단되는 오늘날 운동판의 분위기에서, 안타깝게도 바이섹슈얼은 한국 내 인권운동 판에 아직 데뷔하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그럭저럭 B라는 기호로서라도 바이섹슈얼은 나름 좀 팔리는(?) 대접은 받고 있긴 하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젠 바이도 LGBTAIQ가 나열되는 연대 행사에 초청받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고려되고는 있으니 말이다. 요샌 (T도 그렇고) B도 그렇고 어느 정도는 사회적으로 통할 만한 다양성의 상징처럼 취급받고 있으니 그나마도 감지덕지다. (AIQ…. 이하 알파벳들은 아직 그나마의 자격조차 득하지 못한 거라고 봐야 할까?) 그만큼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의 반사이익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마저도 거듭 든다.

그런데 그 얇디 얇은 지위마저 속을 들여다보면 그리 튼실한 것만도 아니다. 바이섹슈얼이 성적지향 중 논-모노섹슈얼(non-monosexual) 성적지향 파트의 대표주자(? 이렇게 표현하면 많은 다성애자와 범성애자들이 화낼 거 안다)로서 대우받고는 있지만, 그래봤자 이성에도 끌려봤다가 동성에도 끌려본 경험 중심으로 해석되는 신뢰도 낮은 곁다리 당사자, 아니면 진성 성소수자인 호모섹슈얼이 되기 전의 모호한 상태(때로 바이섹슈얼은 퀘스쳐너리나 디나이얼의 대표주자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bisexual’과 ‘confused’라는 키워드로 한번 검색해보라. 얼마나 많은 글과 댓글과 대댓글이 이어지는지를…)라는 굴레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이다.

바이섹슈얼 vs. 누구 식으로 싸움을 붙어보자는 거 아니다. 구구절절 앞서 말하였듯이 바이들은 그럴만한 세력(?)도 없다. 지금 비판적 논조로 썰을 풀고 있긴 하나 다수의 눈에는 그저 내부를 겨눈 총질 - 그것도 새총급 - 정도로 보일 것이고, 지난 몇 년 사이에 몇 차례 있었던 “게이 vs. 레즈비언” 버전의 아류작처럼 보일 수도 있단 것도 안다. 아니면 이렇게 어그로를 끌어서라도 그 편가르기에 바이도 살짜쿵 끼워달라는 얄팍한 수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 거 또한 아니니 노여워하시라~

단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중층된 개떡 같은 혐오” 바로 그것이다. "성소수자 인권=모든 인권의 바로미터" 패러다임에 취해서 정작 본인이 그 중층의 차별과 혐오의 가해자란 의식을 망각한 인식, 자신들이 어떤 폭력과 피해의 사건에 대해 합의하고 판단할 권력을 (어느새?!) 지녔다 간주하여 2차, 3차 가해자가 되고도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폭력적 혐오행위, 주류적 담론을 득하지 못한 성소수자 집단(비동성애자-비시스젠더 성소수자 집단)에 대해 위계적 상위를 형성/고수하며 그들에 대해 시혜적 관점과 대상화와 타자화를 가로지르며 평가하고 선도하는 자세, 특유의 선민의식과 엘리트주의, 심지어 무덤에서 부활해버린 듯한 기층과 엘리트 간의 간극의 설정, “공식” 활동을 통해서만 인정되는 체계 속에서 형성되는 카르텔, 이 구조 자체를 동력으로 삼아 진행되는 일련의 제도화와 그로 인해 획득되는 제한된 시민권…. 그 와중에 “공인된” 바이 혐오는 겉으로 드러내 말하지 못할 금기가 될지도 모르며, 내용물 없이 의욕과 언어만 있는 운동으로 화할지도 모르고, 전폭적 지지라는 좋은 게 좋단 식 말의 우산 속에 비판적 공감은 소멸할지도 모른다. 잊지 말자. “공인된 혐오는 몇 배는 더 인지하기도 힘들고 깨기도 힘들다.”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드는 요즘인 것이다. 함부로 "국내 유일의~" 라는 수식어를 쓰지 말아야 하듯이, 퀴어운동이 반드시 하나여야 할 필요조차 퀴어운동의 방식이 여러 갈래의 다른 방향성들이 등장하고 반목하는 것 역시 필연적일 것인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우리로 남지 않아야 할 시기가 슬슬 도래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나는 그 경험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같이 체감된다 말한 바 있다. 소위 ‘우리’ 편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서 일상적으로 혐오 받고 비가시화 되고 스테레오타입화 되는 경험을 겪는 기분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 바이섹슈얼의 존재에 동의한다 안 한다 논하지 말라. 바이섹슈얼의 경험을 대상으로서만 분석하고 평가하지 들지 말라, 바이섹슈얼의 범주와 정의내림을 학습을 위한 학습으로 응대하지 말라, 바이섹슈얼의 불안정을 모노섹슈얼로의 안정감으로 “돌아오길” 기다리지 말라. 바이섹슈얼을 동성애의 변조로 보지 말라.

그러면서 다시금 ‘전유하다’라는 괴랄한 말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appropriate’란 말을 떠올려본다. 야금야금 가져다가 자기 맘에 맞게 바꾸고 고치고 삭제하여 점점 더 그 전체를 자기 것인 마냥 차지하고 이용하는 것. 바이섹슈얼은 전유 당하였는가? 아니, 바이섹슈얼은 어떻게 전유되고 있는가? 바이는 다양성의 상징이라는 겉포장만 그럴싸하게 입은 채, 실상은 텅 빈 구식 언어가 되어 주류 성소수자 운동에 부차적이며 특이한 레퍼런스로서 포섭될 때만 공존을 허해줄 존재가 돼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과연 과한 질문일까? 누구라고 콕 집지는 않겠지만 "바로 너 들으라고 하는 질문이다."

다시 작년 추웠던 그날로 돌아가보자. 그날 다 함께 목청껏 외쳤던, ‘우리’ 모두를 위한 외침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었던 그 구호를 그대로 돌려주련다: “(바이섹슈얼) 존재는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게을러도 좋다면…

이 글을 쓸 준비를 하던 과정에 어떤 분이 “학술적이고 정갈한 언어로 바이 비가시화에 대해 써보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준 바 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왠지 그러한 언어로 썰을 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 글이 읽히길 바라는 그 누군가에게 익숙한 언어와 뉘앙스로 쓰여진 글에서는 분명 "바이섹슈얼/바이/양성애/논-모노섹슈얼"라는 단어들은 언급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글귀의 '바이'라는 단어 속에는 정작 바이섹슈얼이 빠져 있는 거 같은 묘한 기분이 드는 걸까?"를 꾸역꾸역 말해보고 싶었던 거다. 삶으로서의 바이섹슈얼리티가 아니라 박제화된 바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전시되고 있는 참극을 보는 기분인가에 대한 감정을 써보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익숙한 언어의 틀(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도 지나치리만치 익숙해져버린 언어의 틀이기도 하다)로 글 쓰는 방식은 자체 폐기되었다. 지금까지 바이의 비가시화에 대해 썰 풀길 조심스러워하다가 이제 와서 왜 이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느냐면, 언젠간 한 명의 바이섹슈얼의 입장에서 감정적인 글을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글을 다 쓰고 보니, 이 글 역시 어떤 면에서는 쩌는 바이부심(Bi-Pride,모종의 이유로 프라이드란 말에 대해선 시큰둥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에 흠뻑 젖은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겠단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글을 고쳐 써볼 맘은 생기지 않는다.

또한 이 글에 담긴 감정은 그냥 열패감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주된 추세에 맞춰 운동판의 공적 영역(이런 게 있다 치면)에서 드디어 바이가 당당한 일원으로 등장하게 될 장밋빛(?) 미래를 부러워하는 맘을 나 역시 갖고 있고, 주류의 n분의 1이라도 지분을 차지해 놓고픈 욕심이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현재대로라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못할 거란 걸 알고 있기에 생겨나는 열패감에 찌든 글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내가 바라지 않을 그 방향으로 말이다.

솔직히 현재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이 앞으로 수년 후 어떠한 영향으로 우리에게 남을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나의 꿀꿀한 기분이나 전망과는 달리, 오히려 일은 술술 잘 풀려갈 수도 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단한 네임드께서 등장하여 바이섹슈얼에 대한 온갖 오해와 편견을 일거에 휩쓸어버릴 수도 있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도 소용 없이 ‘바이(bi)-라는 접두어가 "둘"이라는 의미라서 바이는 남녀 둘 밖에 고려를 안 하니 성별이분법에 대한 비판 논리 하에 폐기되어야 마땅할 정체성으로 치부되어 버려질 수도 있다. 아니면 바이들이 지레 겁을 먹고 건전함과 정절을 철칙으로 여기며 문란하다 일컬어지는 일체의 실천은 모조리 금기시하여 쳐내버린 정체성으로 재정의한 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집단화할 수도 있다. (그치만… 난 아직도 왜 문란하다란 비판에 대해 우린 문란하지 않다라고 응대하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돠~!!) 그도 아니면 바이섹슈얼 센서라는 기계가 발명되어서 나는 “73% 여성애 쪽으로 기운 바이섹슈얼”이라는 자격증을 할당 받는 세상이 뿅 하고 도래할지도 모르겠다. 어? 생각해보니, 이런 세상이 오면 일면 맘 편할 수도 있겠다. 나 자신이 바이임을 구구절절 입증하는 것도 만사 귀찮으니, 차라리 걍 날 몇 퍼센트 바이라고 지정해주세효~!!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이 글의 논조와 똑같은 글을 또 쓰고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든다. 이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벌써 세 번째인 이 전망 역시 맞지 않길 바라며….)


*끝으로 한 줄 요약 : "우리 존재 무시하지 마아~ 빼엑~~!!! 인정투쟁 만쉐~~!!!!" 라고 읽히냐, 이것들아?




*글-암것도 안 하면서 고양이 끌어안고 그냥 낮잠이나 자고 싶은 주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