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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1호] 커밍아웃

[연재] 강랑의 커밍아웃 이야기-1-

“괜찮아, 결혼만 남자랑 하면 돼.”

5년 간의 대학교 생활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을 꼽으라면 그들과의 인연을 이야기 할 만큼 친한 친구들이었다. ‘친할 만큼 친해졌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 날 그들 앞에서 내 성적 지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난 바이섹슈얼이야.”


말이 끝나자 분위기는 ‘아주 조금’ 어색해졌다.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뜻을 되묻는 친구,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친구, 분위기를 살피고는 있었지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친구 등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아주 조금 어색해지긴 했지만 PC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분위기를 앞장서서 깨어버린 친구가 있었다.


“그래, 강랑아. 그래도 결혼은 남자랑 할 거지? 어쨌든 결혼만 남자랑 하면 돼. 알았지?”


명절을 맞아 집에 내려온 조카를 인자하게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문제아로 낙인찍힌 반 아이를 어떻게든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 ‘개과천선’시키겠다는 선생님의 눈빛이기도 했다. 난 너를 정말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니가 당분간은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상관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 넌 결국 내가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내 말을 들어라... 라는 어떤 간절함(?)과 진정성(?)이 그 짧은 반응 속에 담겨 있었다.



고뤠? 이렇게 막장이어도 결혼만 하면 된다 이거지?


우습게도 그 친구의 PC하지 않은 발언 이후로 ‘일시정지’ 상태로 멈춰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연스러움을 되찾은 친구들의 얼굴은 ‘내가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나왔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한때 저러는 거겠지 뭐. 정말 여자 친구를 사귄다고 해도 ‘최종 목적지’(!)인 결혼만 남자랑 하면 되는 거지 뭐. 다들 그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말썽꾸러기에 철부지가 되어 버린 내가 어떻게 그 상황에서 빠져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평소대로 더 철없는 행동이나 과장된 반응을 통해 그 순간을 ‘개그로 승화’시키며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벌써 몇년전 일이지만 난 아직도 가끔 친구의 저 말을 곱씹는다. 내가 어떻게 커밍아웃을 했는지, 어떻게 상황을 수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 말만은 뇌리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는다. 바이섹슈얼을 이성애로 편입되기 위한 과도기적 중간단계로 보는 시선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결혼을 ‘결승선’으로 보는 인식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이 사회의 ‘표준 시민’이 되기 위한 ‘적법 절차’인 결혼만 남성이랑 하면 문제될 것 없다는 사고방식. 그때도 지금도 결혼 생각이 없는 나지만, 혹시나 만약 정말로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난 그 친구 말대로 ‘안전하게 결승선에 도달’하게 되는 걸까? 진심으로 내 남성 배우자를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라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그 친구의 말을 따른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게다가, 결혼을 축하해주러 예식장을 찾은 그 친구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역시 내 말 듣는 것 봐.’하고 뿌듯해할까? 그럼 나의 전(前) 여자친구들은 내 인생에서 아예 사라지는 걸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남자랑 결혼하는 것 봐. 박쥐같은 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만, 최근에야 서로의 성적 지향을 확인하게 된 지인이이 있다. 퀴어 관련 행사에 다녀온 얘기를 들뜬 얼굴로 늘어놓던 나를 따로 불러내 대화를 나눈 게 시작이었다. “너 아까, ‘거기’는 왜 간거야? ‘그런 데’ 가는 이야기를 친구 앞에서 그렇게 막 해도 돼?” “뭐라구요?” “아직 우리나라에서 ‘그런 쪽’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데...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고. 남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뭐라고요 이 양반이 싸우자 1!(&^%!Y*(@*j(#^”


내 발차기를 받아랏!



...적다 보니 그날의 빡침이 다시 떠오를 지경인데, 어쨌든 중요한 건 나는 그날 그 지인에게도 다시 커밍아웃을 했고, 그 후 계속해서 나에게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 너만 알고 있으면 되지, 왜 그걸 굳이 남들에게 밝혀야 하느냐.” 하는 말을 늘어놓던 그 지인은 장시간의 떠봄(?) 이후에야 자신도 게이라는 걸 얘기해 주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지금 사귀고 있는 상대가 있다는 얘기도. 한 편의 청춘물 찍듯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를 보며 ‘아ㅡㅡ 커플ㅡㅡ’ 하고 짜증을 내셨던 동네 주민이 계신다면 이 자리를 빌어 사과를 드리고 싶다. 아무튼, 커밍아웃을 한 게 처음이라던 그 지인은 무척 보수적이었고, 바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내 질문에도 예상 가능한 답을 들려주었다.


“솔직히, 불안하지. 지금 좋다고 나 만나도, 결국에는 여자랑 결혼할 것 같아서.”


김조광수와 김승환 커플의 동성 결혼식에 대해서는 무척 부정적이었으면서도 (‘게이=여자같은 애들’이란 사고방식이 팽배한데 굳이 그렇게 드레스를 입어야 했냐, 아직 인식이 좋지 않은데 꼭 남들 보는 앞에서 사회 이슈를 만들어야 겠냐 등등-_-) 만약 자신이 결혼을 한다면 첫사랑이라는 지금 이 상대와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수줍게 꺼내던 그 선배에게도 결혼은 일종의 ‘결승선’, 혹은 그것까진 아니라도 무척 중요하고 뜻 깊은 일인 듯 했다. 그리고 바로 그 결혼을 ‘이성’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이들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글-근로소득세를 내고픈 강랑

*이 글은 웹진 다음호(제2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