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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호] 아무거나

[기획] 아무렇게나





어떤 이들은 ‘아무렇게나’ 혹은 ‘아무거나’가 생각하지 않는, 혹은 생각을 포기한 태도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생각이 제멋대로 날뛰는데 그 중 어떤 것도 죽일 수 없을 때야말로 두 손 들고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지 뭐’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지 않을까. 누군가 한국에 바이섹슈얼 단체가 생기면 좋겠느냐고 물어볼 때 내 대답이 바로 그렇다.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 그러니까, 생기면 좋겠는 만큼이나 생기지 않는 것도 좋겠다.


누군가에겐 어이없는 대답일 수 있겠다. 이런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바이섹슈얼을 결집할 커뮤니티나 단체가 없는 까닭에 바이섹슈얼이 일상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비가시화’되고, 바이섹슈얼 의제가 운동이나 학술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아도 좋은 걸로 여겨지고 있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어서 빨리 단체를 만드는 것만이 이 상황을 타파할 길이지 않겠느냐고. 있을 수 있는 반응이긴 한데, 나는 언젠가 이런 식의 말을 듣고 아주 교묘하다고 감탄했다. ‘바이섹슈얼은 단체가 없기 때문에 비가시화된다’고 상황을 정리하는 순간, 그 말의 화자는 자신이 일상적으로, 빈번하게 바이섹슈얼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인식론에 참여한다는 점을 숨긴다. 심지어 그는 바이섹슈얼을 평가하는 위치에 설 수 있다. 이를테면, 만약에 남자 애인이 있는 남자나 여자 애인이 있는 여자는 모두 당연히 게이/레즈비언/동성애자로 생각하고, 동성으로 이루어진 커플을 ‘동성애 커플’로 부르고 동성 간의 결혼을 ‘동성애 결혼’이라고 부르고, 동성애는 타고나는 본질이라 일생에 걸쳐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성적 유동성이란 사이비 학자들의 헛소리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성적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성적 취향(sexual preference)이라는 말을 배격하고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라는 말을 채택해야 마땅하다고 강변하는 사람이 바이섹슈얼이 어서 빨리 가시화되어야 하겠다고, 바이섹슈얼 단체가 없어서 참 안됐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소용이 있는 태도일까?


그럼에도, 바이섹슈얼 관련 의제를 주요 사업으로 두고 활동하는 운동 단체가 이뤄낼 수 있는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식의 개입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다. 예를 들어 10-20년 전과 달리 현재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 전반엔 트랜스젠더 의제는 동성애와 다르니까 좀 덜 열심히 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대놓고 말하기는 힘든, 그런 정도의 분위기는 형성되어 있다. 이런 변화는 비(非)트랜스 활동가들의 끊임없는 성찰과 행동, 그리고 동성애자 단체 안팎에서 활동해온 트랜스젠더/활동가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이슈를 중심에 두는 ‘단체’가 노력해서 얻어낸 결실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닌데도, 아니 오히려 그런 역사를 생각할 때 단체라는 말 앞에 주저하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니까 단체의 결성이 당연히 어떤 집단의 성취나 진보고, 가시화나 인권신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관점은 너무 일면적이지 않을까.

범주의 세분화가, 이전부터 존재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범주의 이름을 빌려 등장하는 상황이 진보인가. 그럴 수 있다. 일례로 동성애 운동으로 포섭되길 거부하는 ‘독자적인’ 트랜스젠더 운동의 등장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진보다. 그러나 이는 동성애자에게 트랜스젠더라는 범주가 낯설고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 트랜스젠더라는 별도의 범주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동성애라는 범주 안에서 젠더 무법자 이슈를 주요한 것으로 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적 동성애자 범주의 무능을 증명하며, 관점에 따라 트랜스젠더 운동의 등장은 동성애 정체성 정치나 동성애라는 범주의 ‘퇴보’로 독해될 수 있다. 한국에서 바이섹슈얼 단체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나 생겨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대두되고, 특히 자신을 바이섹슈얼이 아니라고 명시하는 사람들에게서 꽤 자주 그런 말을 듣는 지금 상황은 어떨까. 이런 상황을 어떤 진보라고 생각해도 괜찮은 것일까.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는 본인을 바이섹슈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바이섹슈얼 의제를 고민하거나, 그 연장선상에서 바이섹슈얼 단체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활동가의 태도가 매우 존경스러우며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이나 단체 한두 곳의 태도나 발언을 넘어선, 바이섹슈얼이라는 이름을 건 단체를 요청하고 기대하는 어떤 경향이나 흐름은 우려스러울 때가 있다. 혹시나 이전에 동성애라는 이름 안에서 당연히 고민하고 논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의제들을 바이섹슈얼 단체로 편히 ‘아웃소싱’ 하려는 욕망의 발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바이섹슈얼 단체가 생기더라도 자금과 인력의 부족에 시달리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 거의 기정사실인 현재 상황에서, 이 단체에게 과중한 기대나 요구가 몰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의 기대나 요구라면 비록 신생 단체에게는 버겁더라도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다름없이 동성애중심적 입장에서(*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단체의 대표나 실무자가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뭐라고 설명하는가, 단체 구성원 중 트랜스젠더와 바이섹슈얼이 몇 명이나 있는가 등의 질문으로 환원할 수 없는 입장론과 인식론의 문제다. 나는 비(非)동성애자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성애중심적 운동단체의 존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을 짜고 인식론적 틀을 설정하며 심지어 무엇이 바이섹슈얼 의제인지 아닌지까지 동성애중심적 운동이 모두 지정해 놓은 상태에서, ‘바이섹슈얼 단체’도 여기 좀 참석해서 그네들의 생각을 승인하고 그들 운동의 정당성에 힘을 실어달라는 요청을 거듭 받게 된다면 그 가상의 바이섹슈얼 단체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혹은 최악의 경우, 여타 성적소수자 관련 단체 내부의 바이섹슈얼 구성원들이 바이섹슈얼은 바이섹슈얼 단체에서 활동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유 무언의 압력을 받게 된다면? 혹은 미국 동성애자의 역사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도 바이섹슈얼인, 또는 자신을 동성애자로 정체화하지 않은 사람들이 현재와 과거의 운동에 기여한 바를 지워버리고 역사를 동성애자의 것으로 전유하는 일이 더 쉬워진다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만일 2016년에 어떤 바이섹슈얼 단체가 생겼다고 가정하고, 그 뒤에 ‘한국에서 동성애자 운동은 1990년대에 본격 시작되었고, 바이섹슈얼 운동은 2010년대 중반에야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바이섹슈얼은 운동에 그만큼 기여를 덜 한, 운동의 후발주자다’라는 뻔뻔한 언설이 별 문제 없이 유통된다면? 게다가 ‘독자적’인 바이섹슈얼 단체라고 내 외부에서 규정 당하는 그 단체의 존재로 인해 바이섹슈얼과 레즈비언/게이의 의제, 고민, 커뮤니티가 겹치는 부분 없이 나눠지는 별개의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것이 된다면?

 

이 모든 일들이 지나치게 비관적인 예측만 좋아하는 나의 기우에 불과하다는 반론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바이섹슈얼 의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그러면서도 바이섹슈얼이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는 운동이나 커뮤니티가 생긴다면 아마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바이섹슈얼 단체’가 3-4년, 혹은 5-10년 내에는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꼭 애석한 일이라거나 시정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떤 ‘정체성’을 내건 단체가 없어도,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바이섹슈얼 의제와 인식론을 점점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면 단체나 커뮤니티가 없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독해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또는 심지어 성적소수자 커뮤니티나 운동 및 전체 사회에서 ‘바이섹슈얼’이라는 단어가 앞으로도 지금과 같거나 심지어 더 못한 취급을 받게 된다고 해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성애와 동성애의 이분법,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 그리고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이분법에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 그것을 다시 사유하는 흐름이 형성된다면 내 기준에서 이것은 ‘바이섹슈얼의 가시화’보다 더 좋은 일이다 (혹은, 내 기준에선 더할 나위 없는 바이섹슈얼의 ‘가시화’이다). 따라서 바이섹슈얼 단체가 생기는 상황이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으며, 단체가 없는 현재의 상황 또한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될 수는 없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시간은 선형으로 흐르지 않고, 역사는 발전하거나 진보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냥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어느 쪽이든 좋다.


*글-가을을 사랑하는 이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