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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호] 아무거나

[기고] 다시, 뮤즈에 대해; 한국퀴어문학의 바이섹슈얼




 *기고-보배


책을 펴봅니다. 그곳에서 반가운 사람들과 마주칩니다. 게이 레즈비언에 비해 척박한(!) 수이지만 바이섹슈얼 인물을 다룬 작품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 반가움은 잠시, 독자의 궁금증(과 때로는 분노)이 불거집니다. 그런데 잠깐, 문학 작품의 인물은 어디까지나 허구죠. 그렇기에 우리는 이 바이 인물들과 (실제 사람을 대할 때처럼) 역동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몇 안 되는 힌트를 주워 담습니다. 왜 작가는 바이섹슈얼 인물을 만들어 냈을까? 이 작품에서 그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먼저 마지막 질문부터 답해 볼까요. 바이섹슈얼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요?


※경고: 극단적인 요약이므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나 주제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작가분들께 (일단)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또 경고: 한국퀴어문학의 척박한 현실을 고려하여, 작품에서 바이섹슈얼, 양성애자로 분명히 정체화되지 않더라도 바이섹슈얼 모티프(?)를 함의(?)한 경우를 함께 다룹니다. 애매해서 죄송합니다.

 



케이스 1.

1년 전에 헤어진 T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름을 S로 바꿨다고 한다. 알고 보니 본명은 Y라는데, 그마저도 확신이 없다. 직업도 전화번호도 다 거짓말 같다. 맥주를 ‘괴테의 음료수’로 표현하는 그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라는 예술가 남자의 집. 날 부르던 ‘자기’라는 호칭도 그의 앞에서 ‘언니’로 바뀌고, 내가 없는 틈에 남자에게 귓속말로 내 험담을 하는 T, 아니 S, 아니 Y. 나는 T를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나쁜 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려 한다.

-권여선 단편소설 「나쁜음자리표」(2004)


케이스 2.

주변에 제대로 된 남자들이 없어 한숨만 나오는 와중에, 쿨하고 매력적인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랑은 판타지일 뿐, 에로스를 믿는다는 그녀. 애인 사이로 규정하지 않은 남자들과 자유로이 섹스하지만 여자와도 해보고 싶다는 그녀. 그녀와 사랑에 빠진 뒤 나는 스스로 양성애자라고 생각하지만, 점점 남자들에게 흥미를 잃어가니 레즈비언이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자유연애주의자인 그녀는 나와의 섹스를 즐거워하지만 연애에는 뜻이 없는 것 같다.

-박삼교희 장편소설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2011)


케이스 3.

유방암으로 인해 (자칭 “여자를 거세당한”)유방 절제 수술을 받은 정흔은 뭔가 모르게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 그녀는 연하의 남자들과 연상의 여자들을 만나면서 맥주를 마시고, 클래식을 듣고, 영화를 즐겨 본다. 어딘지 아슬아슬한 끈에 매달려 사는 듯한 예민한 정흔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 나와 정흔, 그리고 남자(인)친구 선후 사이에 특별한 관계 자장이 흐른다.

-전경린 단편 「밤의 서쪽 항구」(2011)

 

분노하신 독자분들 다시금, 죄송합니다. 일단 진정하고 생각해봅시다.

굳이 저처럼 까탈스러운 독자가 아니더라도 위의 세 가지 케이스에서 바이섹슈얼 인물들의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은 너무나 매혹적입니다. 억압적인 성 관념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성별이분법, 모노가미, 이성애로부터 자유로운—사실 자세히 읽어보면 자유로운 것 같지도 않지만—마성의 사랑꾼입니다. 그러나 결코, 이 팜므파탈 뮤즈들이 1차 화자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주로 이성애자‘였던’) 화자 앞에 짠하고 나타난 바이들이 화자를 유혹하고, '새로운 성의 세계'로 입문하도록 도와주고, 그러나 평범한 화자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연애방식(폴리가미 등)으로 결국 화자를 상처 주고 떠나가는 식이, 현재 한국 퀴어문학에서 바이섹슈얼 서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바이섹슈얼에 대한 편견이 폴리가미에 대한 편견과 대단히 중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일단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봅니다. 작가는 왜 바이섹슈얼 인물을 썼을까?

힌트 하나를 또 주워봅니다. 바이섹슈얼 작품의 작가는 거의 대부분이 여성입니다. 유독 여성 작가가 여성 바이섹슈얼을 재현한 경우가 많지요. 어쩌면 자유로운 성 담론을 억압하면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기괴한 성 판타지를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지도요. 결국 여성 작가들의 상상 속에서 바이섹슈얼은 이성애&남성 중심주의 사회로부터 가장 자유로이 탈출할 수 있는, 적어도 탈출을 꿈꿀 수 있는 사랑꾼의 예시인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성애 가부장으로부터의 가출이라는 비슷한 목적의식을 가지면서도 동성애를 그려낸 작품들도 많았거든요. '내 정체성은 OO야'라는 정체성인식/선언 없이 바이 '같은' 혹은 레즈비언, 게이 '같은' 인물들이 쿨하게 맴도는 한국 퀴어문학의 흐름을 볼 때, 바이섹슈얼은 동성애자와 크게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성의 사랑꾼이나 (오독된) 자유주의자로 대표되는 바이섹슈얼리티는 비이성애자 혹은 성별이분법의 '반대항'으로 그려지고,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게이/레즈비언과 구별이 가지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성애자 화자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또는 게이 레즈비언보다 '쿨한' 인물이 필요해서 바이섹슈얼로 쓰는 경우가 많은듯합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재생산되는 이런 편견에 대해서는 문학 외 바이섹슈얼 담론에서도 수 차례 지적해왔기 때문에 더 길게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하여 많은 경우 책 마케팅 과정에서 바이섹슈얼로 소개되지 않고 동성애자/게이/레즈비언과 혼용되어 표기되곤 합니다. 실례로 위에 언급한 세 작품 모두, ‘레즈비언’ ‘동성애’라는 단어로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뮤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제목의 의미를 밝혀보려 합니다.

가뜩이나 남성'적' 예술 주체와 여성'적' 뮤즈에 대한 논의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요즘, 이성애자 시스젠더 작가가 성소수자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도 똑같은 질문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반 대중보다 멀리 보기 위해, 쿨해 보이기 위해, 세상의 모순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이유로 작가들은 성소수자 소재에 ‘꽂’힙니다. 나는 이렇게나 소수자 문제에 민감하다거나 이렇게나 젠더/섹슈얼리티 지식이 해박하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요. 그리고 전혀 모르거나 아주 잘 알 때보다, 오히려 어설프게 알 때 말이 많아지는 인간 심리도 이해하구요.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왔듯, 예술의 주체는 이미, 근본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대상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뮤즈도 예술을 할 수 있다는 모순적 표현은, (적어도) 성소수자를 재현한 퀴어문학 안에서 완전히 바스라집니다. 현재 퀴어문학은 비당사자-이성애자-시스젠더 작가의 작품들에 많이 기대어 있고, 그 수가 적지 않음에도 비슷비슷한 이미지들이 계속 재생산되는 형국이었으니까요.

작가들의 뮤즈는 작품 안에만 있을 뿐, 현실에서 사람의 입체적인 모습과 목소리로 만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더없이 꿈같기만 한, 사람 같지 않은 뮤즈의 위치를 벗어날 때도 되었지요. 언제나처럼 결론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 싸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당연한 모습을 그려내는 것. 숨소리 없이 삐거덕대는 뮤즈들이 책을 찢고 나오길, 사람냄새 나게 울고 웃고 사랑하고 싸우길, 직접 펜을 들고 멋진 작품들을 많이 써주길. 투박하게 빌어봅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 <고향> 中

 

덧: 이렇게 마무리하면 너무 우울한데다가 퀴어문학에 대한 오해만 커질 것 같으니 다급한 마음으로 추천작을 덧붙여봅니다. 좋은 퀴어문학도 존재하고 점점 늘어나고 있거든요!(쩔쩔)


전경린 장편소설 <엄마의 집>(2007)은 이혼 후 싱글맘이 된 ‘미스 엔’, 아빠가 재혼해서 낳은 딸 ‘승지’, 승지의 반려토끼와 함께 새로운 가족을 꾸려가는 스무 살 ‘호은’의 이야기입니다. 호은은 스스로를 바이섹슈얼로 정체화하고 엄마에게도 커밍아웃을 하는데요, 자긍심을 토대로 미래를 설계해가려는 긍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안보윤의 단편소설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2010)는 인터섹스 바이섹슈얼 주인공 ‘유 진’에 대한 눅눅하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유진의 삶과 사랑은 퍽퍽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유진과, 유진을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마냥 행복한 이야기를 그려낸다고 좋은 작품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입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는 김려령의 <트렁크>(2015)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작품 자체는 호불호가 갈릴법한데, 국내에선 좀처럼 없는 남성 바이섹슈얼 인물을 (짤막하게ㅠㅠ) 소개하고 있고,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의 양성애자 차별을 다루고 있어서 (이것도 아주 짧게ㅠㅠ) 흥미롭습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 새로운 장편을 써도 좋겠다 싶을 정도. 따끈한 신간이기도 하니,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듯!



*글-퀴어문학마니아 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