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진: [3호] 아무거나

[기고] 나따시는 혼또니 양성애자 데스까아




*기고- Heejoo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이성애자들은 자기가 이성애자라는 거, 당연하게 알고 있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LGBT 커뮤니티에서 흔히 나오는 이런 말들을 들으면 사실 좀 뻘쭘해진다. 나는 조금 늦게 나의 양성애 성향을 깨달았고, 스스로 양성애자로 정체화하게 된 건 그보다도 나중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 정체성은 타고나기 때문에 임의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맥락에서 나온 말일 테고 그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원래 다들 처음부터 당연하게 아는 거야" 라고 하시면 슬쩍 손을 들게 된다. 저기요, 저는 아닌데요….

 

나는 평범한 이성애자로 자라났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호감을 느낀 상대는 동갑의 남자애들 중에 있었다. 일곱 살 때 유치원에서 단체로 에버랜드 간 날, 내가 춥다고 덜덜 떠니까 "괜찮아, 안 추워." 하면서 안아준 이름도 생각 안 나는 친구야, 잘 지내고 있냐?

한국의 평범한 이성애자답게, 성소수자에 대해 알게 된 건 어른들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몇몇 웹툰, 연예인, 미드, 영어권 유머 사이트와 SNS 등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접하게 된 것 같다.


나의 이성애자 인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옆 반 그 애를 짝사랑하게 되면서 끝이 났다. 키 크고 씩씩하고 목소리가 낮고 운동과 과학을 잘 하던 그 애.

많은 사람들이 여고생들의 사랑을 두고 "첫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여자들끼리의 깊은 우정"이나 "풋풋하고 순수한 마음" 같은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얼굴 한 번 보겠다고 그 애가 있는 교실을 지날 때마다 기웃거리고,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발렌타인데이에 그 애가 친한 애들한테 뿌리듯이 나눠준 초콜릿을 받고서 기절할 뻔 하고, 그 애의 생일에 사랑노래만 담아서 구운 CD를 선물하면서 혹시 눈치 챌까 긴장하던 마음들이 첫사랑이 아니었다면 대체 뭐가 첫사랑인지 묻고 싶다(지금 생각해보니 끝까지 눈치 못 챈 그 애는 사실 곰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 애를 좋아하게 됐을 때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웠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매체들을 통해 동성애도 이성애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 애를 좋아한 이후부터, 이성에게만 느껴졌던 호감과 끌림이 동성에게서도 느껴졌다. 그런데도 스스로에게 "바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나 자신을 양성애자라고 부르기를 망설였던 이유 중 하나는 "We are not confused, it is not a phase"를 구호처럼 외치는 LGBT 커뮤니티였다. 본인들이 헷갈린 적 없이 처음부터 확신에 차 있었다고 하신다면, 그래, 그 말 믿는다. 진심으로 축하 드린다. 근데 난 솔직히 말해서 헷갈렸다! 내가 여자한테도 연애감정을 느끼게 된 건 그 애를 만난 이후부터였는걸. 연애는 해본 적도 없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만약에 직접 연애를 해보고 나서 여자보다 남자가 더 좋다고 판단하게 되면, 다시 남자만 좋아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여자와 남자를 둘 다 좋아하는 지금이 그냥 'phase'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나도 '감히' 바이가 될 자격이 있는 건가?

또 다른 이유는 몇 년 전 어떤 유머 사이트에서 본, "preteens these days" 라는 제목의 게시글 때문이었다. 그 글에는 한 여자아이의 메신저 프로필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i'm 12 and i'm bi but i'll neva hav sex with a girl. ew!" 대충 "난 12살이고 바이임. 근데 여자랑은 섹스 안 할 것임. 웩 징그러워"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단지 관심을 받으려고 퀴어인 척 하는 것을 비웃는 내용의 글이었다(바이로맨틱일 수도 있는데...). 이 밖에도 데이팅 사이트에서 남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프로필에 바이라고 써놓는다거나, 대학 가서 술김에 여자랑 키스 한 번 해보고 바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가짜 바이'들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글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성소수자가 되는 것, 혐오와 차별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혹시나 바이가 아닌데 섣불리 바이로 정체화했다가 '가짜 바이'라는 것이 들통 나고 관심종자나 중2병 환자가 되어버리는 게 두려웠다.

 

오랜 고민 끝에, '정체성'이라는 것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바이'라는 태그를 달고 커밍아웃도 할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생각은 이렇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있고, 그 중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바로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마치 옷가게에서 옷을 이것저것 입어보고 맞는 옷을 고르듯이, 여러 가지 정체성을 자신에게 대 보고 맞는 것을 찾아나갈 수도 있다. '가짜' 같은 건 없다. 게이인 것 같으면 게이 했다가, 알고 보니 호모로맨틱 무성애자인 것 같으면 호모로맨틱 무성애자 하면 된다.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의 나는 여자도 좋아하고 남자도 좋아한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은 '바이섹슈얼'이다. 나는 그래서 바이인 것이다. 그뿐이다. 더 이상의 삽질은 하지 않기로 했다.



*글-테레사 리스본의 첩이 되고 싶은 Hee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