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모르겠는지
‘나는 바이다. 그런데? 그래서?’
물음표만 두 사람 사이에 걸려있다. 두 바이가 마주앉아서, 우리가 바이라는 것이,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바이모임에 오고 있지만, 그밖에 바이로 정체화한 친구들이 몇 있다. 어떡하다가 알게 된 사람들, 친구의 친구들, 그들은 바이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 어떤 단어도 쓰지 않지만 과거에 또는 현재에 ‘동성애’라고 할 만한 경험 또는 기억 따위를 갖고 있는 또 다른 친구들이 있다. 또 다른 친구들, 그들은 더욱이 그 친밀함의 시간에 대해 어디에서도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꺼내놓았다가는 어쩌면 가차 없이 깎아내려질 것이다. 훼손될 것이다. 청자들은 그들의 또 다른 시간들로 그 친밀함의 시간을 난도질할 것이다. 그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바이인 친구들과 또 다른 친구들을, 우리가 달리 맺고 있는 어떤 관계나 그로 인한 감정들에 대해 대화하며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만나지만, 막상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관계나 감정들은 또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래서? … 어떻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연애라는 것도 별달리 대단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누굴 만나든 그건 네 알 바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대개의 인간관계와 비슷하고, 다소 더 자기중심적이고, 친구보다 소모적이고, 그건 그런 것일 뿐이며 중요치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까지는 어디서나 피력할 수 있는 가벼운 견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게 됐다. ‘내가 누굴 사귀는지 알려주지 않을 테니까 꺼져.’ 물론 나는 선량하며, 어쨌든 몇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 대한 나의 판단과 호감의 정도는 큰 편차가 있긴 하지만, 상당한 시간을 썼다. 그렇더라도 내가 바라는 모든 것, 바랄 수 있는 모든 것, 내 ‘정체성’, 때로는 나라는 사람 전체까지도 단 한 가지, 현재 또는 가까운 시기 연애의 대상으로부터 규정되는 것에 반감이 든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데 중요했다. ‘앞으로 이백 년은 남성과 안 사귈 것이다’라고 어디다가 적어놓은 적이 있을 정도는 됐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중요했을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은 내가 여자거나, ‘여자 같이 꾸미는’ 여자거나, ‘남자 같은’ 여자거나, 남자이기를 바랐고,(어쨌든 이런 식이었고) 그런 기대를 매번 표출했으며, 조율이라는 이름의 강요와 포기의 과정을 거쳤다. 다른 관계보다 훨씬 성애적일 수 있는 연애관계라는 점에서 나 또는 상대가 여자거나, ‘여자 같이 꾸미는’ 여자거나, ‘남자 같은’ 여자거나, 남자거나, 어느 쪽인지가 매우 중대하게 다뤄지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자기 기준에서 가르는 것은 외모, 외모꾸밈, 행동하는 것 등 세세해졌다. 상대가 나에게 뭘 기대할 것인가를 고려했을 때 상대의 ‘정체성’도 중대해졌다. 그리고 퀴어 문화와 이슈를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서로간의 다른 기대가 걸려있었고, 당연히 ‘바이혐오’도 있었다.
바이혐오란 무엇인가. 대개는 ‘바이라는 건 있은 적이 없어, 이것들아’라는 태도들. 동성애자 가운데 누군가는, 바이란 없다고, 자기 정체성이 동성애자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만이 있다고도 한다. 이성애자 가운데는, 누구나 양성애자 기질이 있다더라, ‘난 아니지만’ 이라고도 한다. 이 둘에게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바이라는 건 있은 적이 없어.’ 또한 이성애와 동성애가 서로의 반대말이며 나머지는 회색분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누구와 연애하느냐’와 ‘결혼할 수 있느냐’는 매우 무척 중요한 문제다. 동성애자는 같은 성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사랑할 뿐 아니라 꼭 사귀고 섹스하고 그래야 한다. 그런데 동성이어서 결혼은 못한다. 너무 사랑하는데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성애자는 다른 성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사랑할 뿐 아니라 꼭 사귀고 섹스하다가 결혼한다. 안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안하는 것이지 못하는 것과 다르다. 결혼한 동성애자는, 그건 좀 불행하거나 이기적일 것 같다고 여긴다. 동성을 사랑해본 그러나 지금 이성과 사귀는 사람은? 그럼 동성을 사랑하는 건 지난 일이니, 이성과 사귈 수 있다면, 섹스하고 결혼하면 된다. 몇 개의 산맥과 거친 바다를 사이에 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그 사이를 잽싸게 날아다니는 바이. 날개를 퍼덕대고 요란하게 자의식의 깃털을 흩뿌리며 파트너를 잽싸게 갈아치우며. 어디에도 앉을 데는 없으리, 너희여. 한번 날아오르면 앉을 수 없는 새여. 이성애의 동산에 둥지를 짓고 새끼를 쳐라. 가증스러운 위장색이여. 그렇게 짹짹거려도 소용없다. … 간혹 이런 식. 바이라는 것은 혼란의 블랙홀이라도 되는가?
그런데 내 안에서도 바이혐오를 발견했다. 바이가 뭔지도 모르겠으므로 역시나 뭔지 다 파악되지도 않는 바이혐오를 발견했다. 나의 가뜩이나 빈약한 논리성을 파괴하고, 나를 더욱 편파적이고 왜곡되게 하며, 억울하면서도 자책하는 듯 이상한 기분에 종종 빠뜨리는 심각한 것, 나의 바이혐오를 찾아낸 것이다. 왜? 내 주위의 누구도 내게 직접적으로 바이냐고 한소릴 한 적은 없다. 간접적으로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구도 내가 바이든 말든 반가워하지 않았고 딱히 지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거부하거나 놀라지도 않았다. 의외랄 수도 있지만 의외라고 할 것도 없고 나와 더 가까워질 것도 없고 멀어질 것도 없다. 아무 일은 없는 듯이 보였다.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왜 나를 바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게 나의 무엇을 드러내기는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의미도 모르겠고, 무슨 마음이 생겨야 하는지도 모르겠으며, 그렇다고 내가 나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굴 만난들 입에 오르지 않는 주제일 뿐이다. 언급하지 않는 주제일 뿐이다.
바이인 친구들과 또 다른 친구들, 그들과도 나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바이인 친구에게, 본인이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니라고 분명히 느끼면서도 마치 자신이 둘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처럼 어제는 이성애자, 오늘은 동성애자 식의 서술을 하는 친구에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욕을 먹기는 똑같으니 이성을 사귀고 결혼하겠다’는 친구에게, 나는 별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서도 입 다문다. 그보다 그 자리에 없는 동성애자로 빙의할 때가 있고 그것에 대해 더 다루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한다. ‘세상에, 저 여/남하고 사귄다고?’라는 생각을 나야말로 남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다. 바이라는 것 자체에 뭔가 묻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찜찜한 기분을 갖는다. 누가 바이라고 했을 때 절대 적대감을 갖진 않지만, 반가운 것 같기도 하지만, 반갑다고 하기는 정확하지 않다. 그가 바이라는 것을 기억하거나 추정하므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서도 막상 그 시간이 재밌는 건지 뭔지 모르겠는, ‘내 마음 나도 몰라’가 초래된다. 이 괴상한 짓을 버리고 싶다. 바이를 혐오하는 다른 이들, 그들의 그 혐오는 아마도 그들이 자기를 어떻게, 어떤 과정과 고민으로 정체화 했는가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어이없는 정체화의 과정이 이런 괴상한 혐오가 스미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내가 바이혐오에 직면하지 않으면 파헤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안하니까 어려울 것이다.
*글-나무늘보를 좋아하는 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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