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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2호] 연애

[기고] 너와 연애하고 싶었다

*기고-밀크티


당연한 줄 알았다. 여자에게 설레는 것, 나는 누구나 그러하리라 짐작했다. 곱고 보드라우며 이토록 향기로우니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유독 성숙한 또래 여자아이들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밤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채, 나는 조용히 사춘기를 맞았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봄이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나 역시도 이 두근거림은 우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얼결에 보다 늦된 소녀로, 아직 때가 안 온 어린아이로 자신을 남겨두었다.


나의 봄은 봄비만 추적추적 내린 때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어도 동성 친구와 함께 샤워하는 일이 부끄러워지고, 이성 친구의 벌어진 옷깃 새로 보이는 그을린 피부에 두근대던 시절이었다. 중학생때 늘 아기 분 냄새를 풍기던 (여자)친구가 너무 좋아서 껴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으면 키스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몸짓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푹 빠진 줄을 모르고 이 감정을 그저 동경하는 걸로 여겼다. 나도 그렇고 남들도 그랬다. 주변에 커밍한 레즈비언은 단 한 명, 머리가 짧고 소년의 몸짓을 하던 친구로 으레 동성애라면 떠오르는 전형이었다. 그녀와 나를 비교했을 때 어쩐지 나는 그녀만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 같아 속상했다. 가장 큰 차이는 ‘남자’였다. 남자에게 끌린다는 점은 동성 친구를 향한 모든 감정을 우정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반 검열로 온 학교가 난리였을 때 동성애만이 회자되고 세상은 갑작스레 게이와 레즈비언으로 뒤덮여 ‘일반’은 ‘이반’ 괴롭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사이 오갈 데 없는 나의 감정은 일반도 이반도 아닌 것이 되어 조용히 ‘남자’ 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열여덟이 되었다.


이제사 말하지만 첫사랑은 고등학교 단짝이었다. 세상 풍파라고는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어 뵈는 애였다. 늘 지켜주고 싶었고 특히 남자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말 한 마디면 까르르 웃어 넘어가던 모습에 더욱 반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시중들듯이 그녀를 쫓아다녔는데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친한 남자애가 하나 함께 했고, 나는 그를 좋아하기로 그녀는 그에게 설렌 상태로 묘한 관계를 이루며 몇 년을 보내게 되었다. 좋아하기로 결심한 나로서는 이성애라는 안전선에서 자신을 속여가며 그녀를 사랑할 수 있어 행복했다. 또 그녀가 설레던 그 남자애는 정작 나를 눈여겨 보고 있어 모두가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 나는 죄책감과 번민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삼각관계였다. 하지만 고3이 되고 이 관계는 무참히 무너져버렸다. 내 탓이었다. 나 홀로 그들과 떨어져 공부하고 생활하게 되면서 그녀는 남자들을 접하기 시작했고 나를 보던 그는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으며 나는 한 남자애의 열렬한 구애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으리라. 나는 구애를 받아들였고 그녀는 그의 단짝친구와 사귀어버렸으며 그는 낙동강 오리 알이 되었다. 사랑은 끝이 나버렸다. 기묘한 세 사람분 연애가 마침내 파국을 맞이한 셈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내 첫 연애는 ‘연하남’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온갖 부러움을 받았다. 연하인 것도 모자라 호감형 외모에 농구도 잘하고 성격이 좋아 친구도 많은 ‘그런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니 참으로 뿌듯했다. 사랑만 주다가 받는 입장이 되는 경험은 또 색달랐다. 엄마가 늘 말하던 ‘남자가 주는 울타리’라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뭐랄까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시선에서 나는 사랑스런 소녀였다.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아니었다. 그녀와 달랐다. 그간 참아왔던 감정이 그를 만나며 다 터져 나왔다. 짝사랑하며 허기졌던 애정은 그를 빼앗듯이 집어삼키며 말했다. “나를 지금보다 더 사랑해줘.” 그 후 나는 첫사랑을 그 애라고 급급히 정정하고서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구겨 넣었다. 끝끝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와 나를 사랑하는 그는 마음속에서 혼선을 일으켰다. 어리석게 우정을 사랑이라 착각했다고 무시하기엔 그녀의 자리가 너무 컸다. 그녀를 사랑한 건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그저 사랑받는 상황에만 취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첫 연애는 얼마를 못 가고 끝나버렸는데, 그녀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무슨 수를 써도 지워지지 않았다. 궁금하다. 이제는 멀어지고 없는 그녀에게 만약 고백했더라면 지금과 다른 내가 존재했을까? 사실 그 날, 잠들어 있는 네게 차마 키스는 못 하고 이마만 쓸어내린 걸 너는 알고 있을까? 나는 벽장을 열고 나선다. 그래, 나는 양성애자, 너를 사랑했고 그를 좋아했단다.





*글-모태신앙 밀크티

*이미지 출처: Purple Sherbet Photography

원본 이미지: https://www.flickr.com/photos/purplesherbet/10213581636/in/photostream/